지난 1월 해외전지훈련 출발을 앞두고 주장에 재선임된 이범호(35)는 다소 부담스러운 듯 했다. 두번째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한 첫 시즌이었고, 주장을 계속 맡아왔기에 후배에게 주장자리를 넘기고 싶었다고 했다. 코칭스태프에 주장 후보로 추천까지 했다.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리빌딩과 일정 수준의 성적,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고 있던 김기태 KIA 타이거즈 감독은 '캡틴 이범호'가 필요했다. 대다수 베테랑 주축 선수가 애리조나 훈련기간에 국내 개인훈련을 하다가 일본 캠프에 합류했는데, 이범호는 40일이 넘는 스프링캠프 내내 선수단과 함께 했다. 선수단을 이끌어가는 '주장 리더십'은 시즌 내내 경기장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득점 찬스에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팀 공격에 힘을 불어넣고 있다.
'만루의 사나이' 이범호. 2~3년 전부터 이범호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그가 만루찬스에 타석에 서면 숨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경기장을 가득채운다. 물론, 상대 벤치, 투수도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타자 또한 다르지 않다. 만루기회가 무득점으로 허탈하게 무산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 이범호는 뭔가 좀 다르다.
최근 이범호는 두 번의 만루 기회에서,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먼저 지난 9월 23일 원정 NC 다이노스전. 5회 무사 만루에서 좌월홈런을 쏘아올렸다. 상대 에이스 에릭 해커가 던진 초구 시속 131km 체인지업을 받아쳐 만루홈런으로 만들었다. 이번 시즌 32번째 홈런이 개인 통산 15번째이자, 이번 시즌 2번째 그랜드슬램이다.
만루홈런이 마술처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때가 많은데, 이제 이범호를 빼놓고 만루홈런을 얘기할 수 없다. 이범호는 지난해 심정수(통산 12개)를 넘어 통산 최다 만루홈런 고지에 올랐고, 계속해서 새 기록을 쓰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한시즌 30홈런을 때린 그가 만루홈런에선 홈런으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레전드급 강타자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범호는 2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t 위즈전에서 2타점 결승타를 때렸다. 이 때도 만루찬스가 이범호 앞에 만들어졌다. 1-1로 맞선 8회말 2사 만루에서 상대 외국인 투수 조쉬 로위를 맞아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범호는 "로위를 상대해봤는데, 직구와 변화구 구위가 모두 좋아 공격적으로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운이 좋아 배트 끝에 걸린 공이 안타로 연결됐다"고 했다. 승부를 결정지은 한방을 터트린 선수로서 상당히 겸손한 멘트다. 피말리는 순위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시즌 막판, 주장이자 중심타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타석에 섰을 것이다.
그런데 이범호가 유독 만루에서 강한 이유가 뭘까. 지난해 이범호에게 이 질문을 던졌더니 "이상하게 만루라고 해도 크게 긴장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시간이 더 큰 자신감, 집중력을 선물했을 것이다. 사실 이제는 이범호를 앞에 둔 투수가 더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시즌 16번의 만루기회에서 14타수 6안타, 타율 4할2푼9리, 2홈런, 17타점. 이범호는 만루에서 꾸준히 잘 했다. 지난해에는 4할4푼4리-3홈런-17타점, 2014년에는 6할6푼7리-3홈런-17타점을 기록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