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리우올림픽을 앞둔 7월이었다.
리우올림픽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신의 가혹한 시샘에 함께하지 못했다. '작은 위안'은 있었다. 병세가 호전됐다는 희소식이 들렸다. 대한축구협회도 그의 복귀를 준비했다. 전임지도자로 축구와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8월, 그가 꿈꿨던 올림픽이 지구 반대편인 리우에서 개막됐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2회 연속 올림픽 메달을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는 TV를 통해 올림픽을 지켜봤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하며 기대감은 한껏 상승했다. 그러나 리우 여정은 8강에서 멈췄다. 그 또한 진한 아쉬움을 삼켰다.
9월이 열렸다.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됐다. 20여일 전 다시 입원했다. 어떤 고난에도 꿋꿋하게 맞서 극복했던 터라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길이었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광종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감독은 26일 새벽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2세.
한국 축구도 비통에 젖었다. '이광종'이라는 이름 석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희망이었다.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또 견딘 끝에 한국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 감독은 현역 시절 유공(1987~1995년)과 수원(1996~1997년)에서 266경기에 출전, 36골-21도움을 기록했다. 성실한 미드필더로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태극마크와 인연이 없었다. 국가대표 출신과 비 국가대표의 출발은 천양지차다. 보수적인 축구판에 '무명의 선수'가 지도자로 성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는 2000년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를 통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5세 이하(U-15), 20세 이하(U-20) 대표팀 수석코치를 거친 이 감독은 2007년 기회를 잡았다. 유소년 지도자 1세대로 쌓은 노하우를 인정 받았다. 2007년 17세 이하(U-15)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새로운 싸움이었다. 이 감독이 기댈 언덕은 '결과' 뿐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이력을 감안할 때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재기 불능'을 의미했다. 소신은 뚜렷했다. 거친 파도에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에게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가갔다.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 정확하게 맥을 짚어가며 조련했다. 노력이 빛을 발했다. 2009년 FIFA U-17 월드컵 8강, 2011년 U-20 월드컵 16강, 2013년 U-20 월드컵 8강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사령탑 후보 '0순위'였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여전히 야속했다. 감독 선임을 놓고 충돌이 있었다. 지지와 반대 세력으로 양분됐다. 돌고 돌아 접점을 찾았다. 2013년 11월 그는 인천아시안게임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1년 단기계약이었다. 반전은 화려했다. 28년 만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이광종 꽃'을 피웠다. 지도자 길을 걷기 시작한 지 14년 만에 탄생한 '무명의 빛'이었다.
더 이상 의문부호가 달리지 않았다. 이 감독은 2016년 리우림픽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하지만 지난해 초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갑작스레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에서 하차했다. "2016년 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손흥민(토트넘) 지동원(아우크스부르크) 장현수(광저우 부리) 권창훈(수원) 류승우(페렌츠바로시) 김진수(호펜하임) 문창진(포항) 이종호(전북) 윤일록(서울)등 한국 축구를 이끌어가고 있는 1991~1994년생 에이스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거쳤다. 이 감독도 내일이 더 기대된 지도자였다. 존재마저 인식되지 못하는 '들꽃'에서 출발한 그는 끝내 두 번째 꽃망울을 터트리지 못했다.
이 감독은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8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이 감독은 떠났다. 하지만 '이광종'이라는 이름 석자는 축구 역사에 남았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