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간 A대표팀의 중심은 '유럽파'였다.
한국축구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이 후 '포스트 월드컵'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한국 축구를 보는 세계의 눈이 높아졌다. 세계축구의 중심인 유럽행 러시가 이어졌다. 7년 간 세계 최고 클럽 중 하나인 맨유에서 맹활약을 펼친 박지성을 중심으로 이영표 설기현 안정환 송종국 이천수 등이 유럽을 누볐다. 한국축구의 지형도는 K리그에서 유럽으로 옮겨갔다. 1세대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드 인 K리그'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기성용(스완지시티) 이청용(크리스탈 팰리스) 구자철 지동원(이상 아우크스부르크) 등이 잉글랜드와 독일 무대를 누비고 있다. 손흥민(토트넘)의 등장으로 이적료 400억원 시대도 열었다. 이들 유럽파들은 각자 소속팀에서 활약하며 A대표팀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뛰는 K리거-뛰지 못하는 유럽파' 사이의 논란은 있었지만, A대표팀에 온 유럽파들은 분명 제 몫을 해줬다.
하지만 1일 중국전과 6일 시리아전까지, 지난 두 번의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유럽파의 경기력은 달랐다. 중국전과 시리아전 모두 변함없이 중추는 유럽파였다. 최전방에는 지동원이 자리했고, 2선에는 구자철 이청용이 나섰다. 기성용은 주장 완장을 차고 중원을 지켰다. 그러나 우리가 알던 유럽파가 아니었다. 한 수 아래의 팀들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이지 못했다. 볼처리는 투박했고, 번뜩이는 움직임도 없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을 소화하며 경기감각을 올린 손흥민은 그나마 제몫을 했다. 하지만 손흥민은 차출 문제로 중국전만 소화했다. 시리아전에 나선 대체자들은 모두 불만족스러웠다. 유럽파들은 후반 중반이 되면 어김없이 체력이 떨어졌다. 두 경기에서 모두 풀타임을 소화한 선수는 지동원 기성용 둘 뿐이었다. 가뜩이나 교체자원도 없던 이번 대표팀이었다. 중국전 3대2 신승, 시리아와의 충격적인 0대0 무승부, 모두 유럽파들의 부진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같은 불안한 경기력은 불안한 입지와 연결된다. 유럽파는 올 시즌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제대로 된 프리시즌을 보낸 선수는 그나마 구자철과 지동원 뿐이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유럽파 중 가장 입지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구자철도 잦은 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동원은 열심히 뛰지만 공격포인트가 없어 주전 도약이 쉽지 않다.
이청용은 프리시즌을 착실히 소화했지만 여름 내내 이적설로 고생했다. 오른쪽 날개가 아닌 섀도 스트라이커로 보직을 옮겨서야 조금씩 기회를 얻고 있다. 올 시즌 크리스탈 팰리스가 치른 4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하지만 이청용이 뛰는 자리에 계속된 영입 루머가 이어지고 있다. 심적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믿을맨'이었던 기성용과 손흥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캡틴' 기성용은 프리시즌 기간 가진 군사훈련 후유증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에 교체 출전하며 감각을 올렸지만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 전성기보다 살도 붙은 듯 하다. 여기에 프란체스코 귀돌린 감독의 신임을 아직 100% 얻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 시즌부터 출전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에이스' 손흥민은 독일 컴백을 노렸지만 소속팀의 반대로 잔류하게 됐다. 토트넘이 유럽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관계로 기회를 얻겠지만 확실한 주전이 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토트넘은 올 여름 무사 시소코 등 2선 자원 보강에 성공했다. 이번 엔트리에 차출되지 않은 박주호(도르트문트) 김진수(호펜하임) 윤석영(무적) 등의 출전소식은 요원하기만 하다. 슈틸리케 감독의 배려로 이번 2연전에 나서지 않은 석현준(트라브존스포르)도 낯선 터키리그에 다시 도전해야 한다.
기량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한 유럽파는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 물론 체력 등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 자리에 머문다면 결단도 필요하다. 유럽파의 부진은 한국축구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유럽파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