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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피플]이승엽 프로22년, 기록이 아닌 사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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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어느 초여름 대구시민야구장. 경기전 연습을 마친 삼성 이승엽과 허구연, 하일성 두 해설위원이 삼자토크 형식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두 해설위원은 당시 본지에 관전평을 썼다. 기자는 그들이 주고받는 토크를 정리하기 위해 옆을 지켰다.

그해 이승엽은 타이론 우즈와 홈런왕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995년 입단한 이승엽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뒤 빠르게 홈런타자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32홈런-114타점으로 홈런왕-타점왕을 거머쥐었지만 1998년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외인부대들이 KBO리그에 진출하면서 경쟁이 시작됐다. 그날 인터뷰에서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들려주었다.

지금처럼 몸이 벌크업 되지 않았던 '총각 이승엽'은 그때도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야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미소로 대했다. 당시 이승엽에게 받은 첫 인상은 "말을 조리있게 참 잘한다"는 생각이었다. 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독서,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이승엽은 38홈런을 쳤지만 결국 우즈(42홈런)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내줬다. 타이론 우즈는 장종훈의 한시즌 최다홈런기록(41홈런)을 갈아치웠다. 절치부심한 이승엽은 1년뒤인 1999년 54홈런으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클래스로 성장해버렸다. 1999년 아시아홈런신기록에 도전중이던 이승엽을 따라다니며 인터뷰하고 2003년 아시아홈런신기록 달성을 옆에서 지켜봤다. 세월은 빠르게 흐렀고, 이승엽은 8년간 일본에서 뛰다 복귀했다. 기자도 여러 출입처를 거쳐 지난해 11년만에 다시 야구장을 찾았다. 이승엽이 통산 400홈런을 달성했던 포항구장에서다. TV인터뷰를 마치고 성큼 성큼 다가와 악수를 건네며 보인 미소는 주름이 약간 늘었을 뿐 20년전과 같았다.

이승엽은 향기가 있는 사람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역전 결승투런포를 때린 뒤 "(동료들에게)너무 미안해서"라며 눈물지을 때는 지금까지 스포츠 현장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큰 감동을 받았다.

이승엽은 24일 SK전에서 통산 최다타점신기록(1390타점)을 달성했다. 팀선배 양준혁을 넘어섰다. 곧 한일통산 600홈런(2개 부족)을 때려낼 것이고, 본인의 국내무대 복귀시 언급했던 또다른 목표인 2000안타도 '-10'으로 카운트다운이다. 이승엽은 프로 22년 세월은 온갖 진기록을 채워져 있다.

기록이 영원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속에 늘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검색이 발달해 궁금할 때 좀더 빨리, 더 자주 찾을 수 있을 뿐 시간속에 점점 잊혀진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스타에서 대스타로, 전설로. 점점 더 유명해졌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가 한결같다고 말한다. 아버지 이춘광씨가 가정교육을 잘 시켰다는 얘기도 많았고, 타고난 심성에 이승엽이 부단히 겸손하려 노력한다고도 말한다. 이승엽은 '바른생활 사나이' 이미지가 때로는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주위 욕심은 '한명쯤은 이런 선수, 이런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승엽은 내년이면 떠난다.

벌써부터 걱정이다. 슬럼프가 올수도 있고, 내년에 부진할 수도 있다. 칭찬과 찬사가 비난으로 바뀔 것이 분명하다. 잘하면 박수보내고, 못하면 야단치는 것은 팬들의 고유 권리다.

이승엽은 은퇴후를 차츰 고민하겠다고 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명장은 없다. 김응용 감독은 한국시리즈 10승 후 한화에서 고배를 마셨다. 현대 왕조를 일군 김재박 감독도 LG에서의 실패 이후 수년간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선동열 전 KIA 감독도 마찬가지다. 지난 5년간 역대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류중일 삼성 감독도 한순간에 식어버린 시선이 어색하기만 하다. SK를 정상에 올려놨던 김성근 한화 감독도 악전고투다. 하나같이 비난이 칭찬을 뒤덮었다.

전설 이승엽도 은퇴후 지도자로 변신하면 냉혹한 현실과 마주할 것이다. 스포츠인은 선수나 지도자나 칼날 위 인생이다. 한순간에 명성은 두동강날 수 있다. 이승엽은 22년을 버티며 달리고 있다. 꽃길도 있었고, 가시밭도 있었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전설의 마지막 길도 지금처럼 밝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승엽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날, 그날도 미소짓는 이승엽을 보고 싶다. 박재호 기자 jh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