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 들어가려다가도 선수 한명이 보이면 못들어가겠더라고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정치독립 원칙에 따라 정부의 도움도, 기관의 도움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육상 여자 장대높이뛰기의 전설적인 선수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 일본의 육상 영웅 무로후시 고지, 유럽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장인 탁구 선수 출신 장미셸 세브(벨기에) 등 경쟁후보들과 인지도에서 상대도 되지 않았다. 유세는 훈련보다 더 힘들었다. 발 여기저기 굵은 물집이 잡혔다. 밤새 선수촌 방에서 물집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그를 깨운 것은 '평생의 스승' 강문수 탁구대표팀 총감독이 강조하던 '원모어' 정신이었다. "하나 더, 한번만 더 하면 이긴다!" 몸에 밴 '원모어' 정신으로 날마다 다른 후보자들보다 한걸음 더 걷고, 한 선수를 더 만났다.
한발 더 움직인 유승민의 진심을 선수들은 알아봤다. 유승민은 19일(한국시각) IOC가 발표한 선수위원 투표결과, 투표자 5815명 중 총 1544표를 획득하며 2위에 올랐다. 그는 후보자 23명 중 4명만이 선택받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며 2008년 문대성 의원 이후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됐다.
시작부터 힘겨운 싸움이었다. 지난해 IOC선수위원 후보로 나선 유승민은 장미란 진종오 등 걸출한 선·후배들을 넘어야 했다. 사실 후보 선정부터가 작은 기적이었다. 한국체육회의 면접과 IOC의 서류 전형, 전화인터뷰 등을 어렵게 통과한 유승민은 지난달 22일 혈혈단신 브라질 리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개막 전인 지난달 23일, 리우올림픽 선수촌에서 유세를 시작했다. 후보자 중 가장 먼저 선수촌에 입성해 동선을 파악했다. 그는 첫날에만 무려 3만3431걸음, 24.56km을 걸었다.
적은 날은 10km, 보통은 15km, 많은 날은 20km 이상을 걸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선수촌 안을 걷고 또 걸었다. 매일 아침 5시 반에서 6시에 일어나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선수촌을 돌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단복을 입고 경기장을 향하는 선수들을 향해 "굿모닝!" "굿 럭(Good luck)!" 인사를 건넸다.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돌아올 밤 8~10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선수촌 입구에서 이들을 반기고 응원했다.
처음에는 "저 사람 뭐야" 하던 시선이 며칠이 지나자 친근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땡볕 아래 대한민국 선수단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서있는 그에게 먼저 손을 흔들고 말을 거는 선수들도 생겼다. '체조 요정' 시몬 바일스가 속한 미국 체조대표팀은 처음엔 본척 만척하더니 나중엔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너를 뽑겠다"고 약속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다이빙 요정들도 "우리도 추첨('투표'를 이르는 북한말)했습네다"라고 했다. 8월18일 오후 2시, 모든 공식 선거운동이 끝날 때까지 스킨십을 이어온 유승민의 첫번째 당선 소감은 "25일간 지겹게 내 인사를 받아준 선수들에게 고맙다"였다.
IOC의 선거규칙은 엄격했다. 선수들이 모여드는 식당 내 선거운동은 엄격히 금했고, SNS도 공유, 태그 등을 철저히 제한했다. 기념품, 선물, 선거도구 사용 등은 일절 불가능했다.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끼니를 때우기도 쉽지 않았다. 절친한 사이인 일본 탁구스타 후쿠하라 아이는 주먹밥과 간식을 슬며시 놓고 갔다. 루마니아 조정선수는 "힘내라"며 에너지바를 건넸다.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선수들과 가까이 소통하며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그럴수록 선수위원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다. 유세 종료 후 유승민은 "진인사대천명,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적어도 후회는 안 남을 것 같았다"고 했다.
마침내 유승민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문대성 위원의 임기 만료, 이건희 IOC위원의 건강악화로 비상 걸린 한국 스포츠 외교에 유승민의 당선은 금메달만큼 짜릿한 낭보였다. 선수위원은 일반 IOC위원과 임기만 다를 뿐 동·하계올림픽 개최지 투표 등 IOC 위원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유승민은 "기쁜 것도 사실이지만 책임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당장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만큼 IOC와 우리나라의 가교 역할을 잘 하면서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나설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2004년 아테네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깜짝 금메달을 거머쥔 유승민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IOC 선수위원 깜짝 당선으로 행정가의 길을 걷게 됐다. 허투루는 없다. '명함만' 선수위원이 아닌 '행정 업무까지 완벽히 처리하는' 선수위원을 꿈꾼다. 물론 유세에서 보여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을 생각이다. "선수 유승민이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면, 행정가 유승민은 눈빛이 따뜻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승민의 새로운 도전이 이제 막 시작됐다.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