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금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현실은 '승부 조작 사건' 때문에 구렁텅이로 향해가는 데 엉성한 미봉책만 내놓고 있다. 구본능 총재를 위시한 KBO의 수뇌부들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거나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정도의 판단력이 부족한 듯 하다. 어쩌면 프로야구의 인기가 영원할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22일 오후에 KBO가 발표한 '부정행위 및 품위손상행위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은 이런 생각에 더욱 확신을 심어준다. 4년 전인 2012년, '박현준-김성현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내놓은 대책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KBO는 4년 전 사건을 통해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
이는 KBO 홈페이지에서 쉽게 확인된다. 홈페이지 내 'NEWS' 카테고리의 'KBO 보도자료'에는, 그간 KBO가 공식 발표한 보도자료들이 수록돼 있다. 이를 통해 4년 전, KBO가 승부조작 사건 이후 어떤 대책을 만들어 시행했는지 알 수 있다.
2012년 4월 4일, KBO는 '프로야구 8개 구단 부정방지교육 실시'에 관한 보도자료를 내놨다. 시범경기 기간(3월 17~3월 31일)에 8개 구단 선수단을 대상으로 당시 법무부 범죄예방국 법질서선진화과 손영배 부부장 검사와 스포츠토토 감사팀에서 부정방지교육을 실시했다는 내용.
6월 1일에는 '프로야구 부정행위 방지를 위한 암행감찰제 실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오늘(6월 1일)부터 코칭스태프 및 선수단, 구단임직원, 심판위원 등 프로야구 모든 관계자를 대상으로 승부조작 및 경기조작 관련 정보 수집, 불법스포츠 도박, 마약 또는 병역비리 등의 반사회적인 불법행위, 경기와 관련하여 금품 수수나 향응을 제공받는 행위 등 모든 유해행위에 대해 사전 정보 활동을 할 방침이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은 전혀 실효성이 없었다.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는 승부조작 사례들로 충분히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O는 4년 전과 거의 같은 내용을 대책이랍시고 내놨다. '2016버전 방지대책'에는 교육 횟수를 2회에서 4회로 늘리고, 기존 KBO 공정센터를 KBO 클린베이스볼센터로 확대·신설한다는 등의 새로 추가된 내용이 있긴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4년 전 내놨던 대책안의 '재탕'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책안 재탕'보다 더 심각한 게 있다. KBO가 부정행위 관련자와의 연결고리를 끊겠다며 내놓은 '자진 신고' 제도. 그럴듯한 말로 포장돼 있지만, 실상은 범죄 행위자와의 타협안에 지나지 않는다. 제재 감형을 미끼로 범죄 행위자를 찾아내자는 것인데, 실효성도 없을 뿐더러 윤리적이지도 않다.
우선 실효성의 측면. 어이없게도 '자진 신고'제도는 4년 전, '박현준-김성현 케이스' 당시에도 시행됐다. 2012년 2월 29일, KBO는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불법스포츠도박과 관련, 금일부터 3월 5일까지 선수들로부터 자진신고를 받는다. KBO는 검찰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선수들이 3월 5일까지 자진신고 하도록 각 구단에 공문을 발송하였으며, 자진신고 한 선수는 추후 열리는 상벌위원회에서 이 부분을 최대한 감안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기간이 다소 짧을 뿐 '제재를 감경해줄테니 자수하라'는 원리는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유명무실했다. 자진 신고는 부정행위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
두 번째로 윤리적 측면이다. 음지에 숨어있는 승부조작 관련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번 제도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바로 KBO가 먼저 나서 범죄 행위자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는 것. KBO는 "자진 신고한 당사자에 대해서는 영구실격 하지 않고 사안에 따라서 2~3년간 관찰기간을 두고 추후 복귀 등의 방식으로 제재를 감경해주겠다"고 했다. 매우 구체적으로 범죄 행위자에게 거래를 제시한 셈이다. 차라리 4년 전에는 "자진 신고자는 추후 상벌위원회에서 최대한 감안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두루뭉술한 문장같지만, 오히려 이게 더 나았다. KBO 상벌위원회가 주도권을 갖고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
그러나 지난 22일에 발표한 자진 신고제도는 허점투성이다. 이에 따르면 횟수와 금액에 상관없이 자진 신고만 하면 일단 '영구실격'은 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2~3년' 뒤에는 얼마든 복귀할 수도 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제도인가. 이건 마치 자진 신고만 하면 흉악범에게도 가벼운 형량을 주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엉성한 자진 신고 제도는 선수들의 진정한 반성과 고백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당장 지난 23일 승부조작을 자진 신고한 유창식만 해도 경찰 조사 결과 거짓 고백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 소속팀과 KBO에 신고했을 때는 승부조작을 단 1회만 했다고 털어놨지만, 경찰 조사에서 또 다른 범행이 드러났다. KBO 자진 신고제도가 이렇듯 허술하다.
승부 조작은 명백한 범죄행위이자 프로야구의 수렁으로 잡아끄는 최악의 행위다. 그런 행위를 저지른 자는 야구계에서 영원히 격리돼야 마땅하다. KBO는 승부조작 범죄 행위자와 '거래'를 할 것이 아니라 생존을 내건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KBO가 명확히 알아야 할 게 있다. 지금 표면에 드러난 승부조작 가담자들은 '눈에 보인 바퀴벌레'다. 집 안에 바퀴벌레 한 두 마리가 보인다는 건 이미 집안 구석구석에 수많은 바퀴벌레가 있다는 뜻이다. 승부조작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이들 외에 또 가담자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야구계에 가득 퍼져있다. 이렇게 숨은 '바퀴벌레'들을 모두 없애고 싶다면, 집안 바닥까지 뒤집어 엎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어설픈 대책은 안 내놓으니만 못하다. 이러면 '바퀴벌레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반면, 프로야구의 인기는 덧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