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증권사 인수·합병(M&A)에 잇달아 실패, 자존심을 구긴 한국투자증권이 이번엔 직원의 대형 횡령사건으로 망신을 샀다. 더욱이 고객 돈 수십억원을 빼돌린 이 직원이 이전에도 수차례 대형 사고를 일으켜 징계를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월급을 가압류당할 정도로 사정이 나빴던 이 직원을 영업 현장에 그대로 뒀다는 점에서 회사의 관리 부실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18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한국투자증권 강서지점 A차장은 "연 25%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며 대학교수와 대기업 임원 등 고객 20여 명으로부터 30억원 가량을 받았다. 증권사 고객 외에 대학 동문까지 포함할 경우 A차장이 받은 돈은 총 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여당 실력자도 투자에 참여하고 있어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한다'며 회사 계좌가 아닌 개인 계좌로 돈을 송금하도록 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사기 행각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객에게 약속한 수익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면서 한 피해자가 지난 4월 회사 등에 이를 알리자 지난달 돌연 잠적했다. A차장의 사기 사건을 맡은 경기 광명경찰서는 현재 그의 행방을 쫓고 있다.
그런데 그는 과거에도 두 차례 금융사고를 일으켜 징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위탁매매용 고객 돈 수십억원을 활용해 자기 맘대로 주식을 사고팔다가 20억원가량 손실을 냈다. 당시 피해자가 법원에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2013년 회사와 A차장이 함께 피해액의 절반인 10억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회사는 이 사건으로 A차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약 7700만원 급여를 가압류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A차장은 옵션 투자를 해주겠다며 고객 5명의 돈 4억여원을 다른 증권사 계좌로 몰래 받아 자금을 굴린 사실이 들통 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국투자증권은 A차장의 급여통장을 또 가압류했고, 총 급여 가압류액이 6억원대로 불어나게 된 A차장 사건은 금융감독원에 주요 사고 사례로 보고됐다. 이로 인해 A차장은 감봉 6개월 제재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한국투자증권은 A차장을 계속 영업 현장에 뒀고, A차장은 주로 종전에 거래하던 주부 고객을 상대로 이 같은 대형사기 행각을 벌였다.
이와 관련 한국투자증권 측은 "A차장의 비위 여부를 면밀히 모니터링해왔으나 업무 공간 밖에서 벌어진 사고를 예견하기 어려웠다"며 "A차장이 개인 간 계좌를 통해 거래를 했기에 회사에서 파악할 길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앞서 금융사고 때는 관련 내규에 따라 적절한 징계를 했으며, 뚜렷한 내부 규정이 없어 부서 전환 명령을 내리기는 어려웠다"며 "현재 피해자들과 적극적인 합의를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월급 가압류까지 당하는 등 경제사정이 극도로 나쁜 직원을 증권사 창구에서 일하게 했다'는 점에 있어서 소비자들의 불신은 하늘을 찌른다. "한국투자증권이라는 대형회사 직원이기에 믿고 돈을 맡긴 것"이라고 피해자들은 회사의 관리시스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이번 일은 한국투자증권이 최근 대규모 M&A전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신 가운데 터져 나온 일이라, 업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한국투자증권을 2020년까지 아시아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키우겠다며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왔으나 대우증권과 현대증권 인수전에서 잇달아 무릎을 꿇었다. 최근 증권사의 대형화 흐름에서 밀려나는 모양새를 보이게 된 셈이다. 더욱이 당분간 국내 시장엔 대형 증권사가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낮아 판세를 뒤집기 힘든 상황이다.
대우증권을 인수한 미래에셋의 자기자본 규모는 5조7000억원, NH투자증권(옛 우리투자증권 인수)이 4조5288억원, 현대증권을 인수한 KB투자증권이 4조원 안팎이다. 한국투자증권이 만약 현대증권 인수에 성공했다면 통합 자기자본 규모가 6조원을 훌쩍 넘기며 단숨에 업계 선두권 굳히기를 할 수 있었으나 물거품이 됐다. 반대로 KB투자증권은 현대증권과의 결합으로 자기자본 규모 빅3 증권사 대열에 단숨에 오르게 됐다.
이에 김남구 부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리며 또 다른 활로 모색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 특히 인도네시아 시장에 주목하고 있는 김 부회장은 지난 4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인수 대상 증권사를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으나, 이번에 정작 '집안 단속'이 제대로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다시 한 번 자존심을 구기게 됐다. 전상희 기자 nowate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