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코 자이어츠의 좌완 에이스 매디슨 범가너는 현역 메이저리그 투수 중 최고의 강타자로 꼽힌다. 지명타자가 없는 내셔널리그에서 선발 투수로 나설 때마다 매서운 타격을 선보였는데, 지난 1일(이하 한국시각) 아메리칸리그와의 인터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 9번-투수로 나섰다. 지명타자가 있는 아메리칸리그와의 인터리그 원정 경기인데도 브루스 보치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선발 투수 범가너를 타석에 세웠다. 아메리칸리그 주최 경기에서 지명타자를 쓰지 않은 것은 197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이후 40년만이었다. 보치 감독은 웬만한 타자보다 범가너가 낫다고 판단했다. 범가너는 이 경기에서 2루타를 때렸다.
올시즌 17경기에 출전한 범가너는 타율 1할8푼2리(44타수 8안타)-2홈런-5타점-5득점-5볼넷을 기록했다. 지난 4월 10일 LA 다저스의 에이스 클레이튼 커셔와 선발 맞대결을 했는데, 메이저리그 최강 선발 커셔가 던진 시속 93마일 직구를 때려 홈런으로 만들었다. 6이닝 1실점 호투를 펼치면서 타석에서도 수준급 타격감을 자랑했다. 범가너는 통산 13홈런-45타점을 기록중이다.
뉴욕 메츠의 강속구 투수 노아 신더가드는 지난 5월 12일 LA 다저스전 3회에 1점 홈런, 5회에 3점 홈런을 터트렸다. 상대팀 선발 투수에게 홈런 2개를 맞은 LA 다저스 선발 마에다 겐타에겐 잊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날 뉴욕 메츠가 4대3으로 이겼는데, 4점 모두 신더가드가 홈런으로 뽑은 것이었다.
통산 148승을 거둔 마이크 햄튼은 메이저리그에서 16시즌 동안 통산 타율 2할4푼6리-16홈런-79타점을 마크했다.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이던 2001년에는 홈런 7개를 쳤다. 2014년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명투수 톰 글래빈도 691경기에서 타율 1할8푼6리를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스의 에이스 오타니 쇼헤이는 조금 더 특수한 사례다. 4년 전 고교를 졸업하고 입단할 때부터 투타를 겸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주로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 타자로 나섰는데, 올해는 선발 투수 겸 중심타자로 뛰고 있다.
지난 3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 선발로 나선 오타니는 8이닝 무실점, 30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고 시즌 8승째를 거뒀다. 1번-투수로 나선 오타니는 1회초 상대 선발 나카타 겐이치의 초구를 때려 우월 홈런으로 만들었다. 상대 선발 투수의 혼을 빼놓은 시즌 10호 홈런이었다. 2014년 10홈런에 이어 두 번째 두 자릿수 홈런이다. 지금같은 페이스라면 20홈런까지 가능하다. 오타니는 이날 1홈런 1타점 2득점 3볼넷을 기록했는데, 볼넷 3개 중 1개는 고의 4구였다.
올 시즌 45경기에서 타율 3할3푼9리(118타수 40안타)-10홈런-25타점-27득점. 출루율 4할5푼2리, 장타율 6할6푼1리, OPS가 1.113이나 된다. 홈런 타자의 스탯이다. 출전 경기수가 적은데도 팀 내 홈런 3위, 타점 5위다. 시속 160km가 넘는 광속구에 이런 타격 능력이 메이저리그 진출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투타 겸업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 KBO리그에서는 범가너와 오타니같은 투수를 볼 수 없다. 지명타자제를 채택하고 있고, 투타 분업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경기 후반에 야수 자원을 모두 썼거나, 자선 경기같은 이벤트 매치 때나 투수의 타격을 볼 수 있다. 경기 중에 타석에 들어간다고 해도 서 있다가 나올 때가 많다. '투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한다'는 분위기가 고착돼 있다. 타격 재능이 있는 선수라도 나설 여건이 안 된다.
지명타자제는 1973년 아메리칸리그가 극심한 '투고타저'를 완화를 위해 도입했다. 선수가 투타를 모두 하는 야구 고유의 역할에 변화가 온 것이다. 현재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KBO리그가 이를 채택하고 있다. KBO리그는 1982년 원년부터 받아들였다.
이상일 스포츠투아이 비즈유닛 대표(전 KBO 사무총장)는 "실업야구에서 지명타자제를 시행하고 있어, 원년부터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채택했다. 1980년대 후반 감독 회의에 지명타자 폐지안을 올렸는데, 감독들이 반발해 논의도 못 해보고 안건에서 뺀 기억이 있다"고 했다. 당시 감독들은 더 많은 선수 활용을 얘기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이 타자로 80경기 전 게임에 출전해 타율 3할5리-13홈런-69타점, 투수로 26경기에 등판해 10승5패1세이브(평균자책점 2.88)를 기록했다. 두 자릿수 홈런에 두 자릿수 승, 타점 1위. 프로야구 초창기였기에 가능한 만화같은 활약이었다.
KBO리그의 모태가 된 실업야구는 1979년 지명타자제를 도입했다. 윤정현 전 대한야구협회 전무는 "1973년 실업야구 올스타전 때 시험적으로 시행을 했다가, 1979년에 공식경기 전 게임으로 확대했다. 활발한 타격으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결정됐다"고 했다. 고교야구에는 2004년 첫선을 보였다. 당시 고교야구 감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했는데, 찬성이 조금 많았다고 한다. 윤 전 전무는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는데, 투수 혹사를 줄이고, 투타 전문성을 키우면서, 출전 선수를 늘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고 했다. 물론, KBO리그의 지명타자제가 이 결정에 영향을 줬다.
윤석환 선린인터넷고 감독은 "내가 고교에 재학중일 때는 주축 투수가 중심타자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엔 투수와 타자가 포지션별 역할에 집중하는데, 지명타자가 있어야 한명이라도 더 경기에 출전할 수 있어 대학진학이나 프로 진출에 유리하다"고 했다.
지명타자제가 도입되면서 투타에 모두 능한 고교선수가 이전에 비해 줄었다. 두 포지션에서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비중이 큰 투수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대다수 주축 투수가 프로에 입단할 때 투수를 선택했다가, 부상 등 여의치 않을 때 타자로 전향한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을 비롯해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 이대호(시애틀 매리너스), 나성범(NC 다이노스) 등이 투수 출신 강타자다.
고교야구의 지명타자제가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윤 전 전무는 "지명타자가 프로에선 필요하다고 보지만 고교야구는 조금 다르다. 아직 확실하게 재능을 알 수 없는 선수가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고른다는 건 문제가 있다. 고교야구는 학생야구답게 선수가 두 가지를 모두 해보는 게 낫다고 본다"고 했다. 일본 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대회)는 지명타자가 없다.
KBO리그 통산 최다승(210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송진우 KBS N 해설위원은 타격이 좋은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의 투수 강타자들과 거리가 있다. 통산 8타석 4타수 1안타 1타점 2삼진. 사실 타석에서 타격적인 재능을 보여줄 기회가 적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