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렛츠런파크 서울에서는 경마고객들을 위한 이색 행사가 진행됐다. 추억의 레이스가 바로 그 것. 왕년에 이름께나 날렸던 스타기수 출신의 조교사들의 출전, 500m 직선거리에서 짧지만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를 펼쳐보이며 경마팬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날 지하마도에서 기수복을 착용하고 등장순서를 기다리는 조교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5월 27일 진행된 사전 인터뷰 때만 해도 "올해야말로 진짜 리얼한 경주를 보여드리겠다(허재영 조교사)", "타고난 몸이란 게 있다(최봉주 조교사)", "최소 3등은 예상한다(이신영 조교사)", "현역시절 때는 몰라도 지금은 내가 우승 후보(김동균 조교사)" 등 자신감 넘치는 각오를 말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실제 경주를 코앞에 두니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이다.
허재용 조교사는 "무사히 경주가 끝났으면 좋겠다"며 "5등을 예상한다"고 살짝 꼬리를 내렸다. 안병기 조교사 역시 "긴장되거나 그런 건 없지만 경주마가 상대적으로 약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4등은 하지 않겠냐"며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사전 인터뷰에서 공평하게 70kg 부담중량을 달고 뛰자며 큰 웃음을 줬던 황영원 조교사는 "내 몸 상태는 좋은데 말 몸 상태는 좋지 않은 것 같다"며 "그래도 말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는 다이어트를 했으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반면, 시종일관 자신감을 드러낸 출전자도 있었다. "이제는 선배들을 이길 수 있다"던 김동균 조교사는 이날도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든다"며 파이팅을 외쳐보였으며, 홍일점 이신영 조교사 또한 "작년에는 말의 능력이 떨어져서 좋은 성적을 못 냈지만, 올해는 야심차게 좋은 말을 준비했다"며 "1등을 한번은 해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
이날 모든 조교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이는 바로 박윤규 조교사였다. 총 11번 출전해 우승과 준우승을 7회나 거머쥔 최강 경주마 '메니뮤직'을 데리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승에 대한 욕심 때문은 아니고, 경주에 맞는 말을 선택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해명했지만, 주변 조교사들의 질투와 시기는 따가웠다. 최봉주 조교사는 "박윤규 조교사가 너무 쎈 말을 가지고 왔다"고 했고, 이신영 조교사 역시 "정말이냐? 진짜냐?"며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다 박 조교사를 향해 "반칙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다.
기수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올해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데뷔한 외국인 기수 '임란'의 경우 기수복을 입은 조교사들의 모습이 낯선지 연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다. 경마황제 '문세영' 기수 역시 "미래의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오늘은 나도 조교사의 마음가짐으로 조교사들의 주행모습을 볼 생각이다. 들어오면 한마디씩 하고 싶다"고 평소의 '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날 우승을 차지한 이신영 조교사는 출발 직전까지도 '메니뮤직'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여력 했다. 이신영 조교사는 "1번을 받게 된 만큼 숨이 멎더라도 앞도 안보고 경주마를 밀 생각"이라며 선행을 예고했다.
실제로 출발대가 열리자 이 조교사는 당초 말한 대로 앞도 보지 않은 채 경주마를 힘차게 몰았다. 출발과 동시에 선두에 나선 후 단 한 차례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으며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결승선까지 300m를 남긴 시점에서 박윤규 조교사의 '메니뮤직'이 무섭게 거리를 좁혀 들어왔지만 결국 결승선을 가장 먼저 가른 건 이 조교사였다. '메니뮤직'은 아쉽게 2위에 그쳤다. 이 조교사는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뒤돌아 박 조교사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승리를 확신한 듯 한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이 조교사는 "기수는 필요없다. 말만 좋으면 1등"이라며 "문세영도 필요없다"고 재치 있는 우승소감을 전했다. 또한 "드디어 기수 때의 한을 풀었다. 사실 나는 가만히 고삐를 붙들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 알아서 잘 뛰어줬다"고 했다. 오른손을 번쩍 든 세레모니와 관련해서는 "여유가 있어서 한번 해봤다"며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준우승을 차지한 박 조교사는 "이번에는 욕심을 내봤는데 역시 이신영 조교사의 선행 실력은 일품이었다"고 아쉼움을 전했다.
곧이어 진행된 시상식에서 트로피와 꽃을 전달받은 이 조교사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기수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우승비결을 묻는 질문에는 "야심차게 단거리에서 우승을 기대해볼 만한 경주마를 준비한 게 사실"이라며 "훈련을 전담한 팀장이 500m 동안 얹혀만 있으면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만들어 놓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공을 돌리기도 했다.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은 젊은 조교사들이 주로 참여한 경주였는데 앞으로는 안전한 대책이 잘마련돼 대선배들의 경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고 했다.
현장을 방문한 오랜 경마팬들도 즐겁긴 매한가지였다. 이 조교사를 응원했던 한 경마팬은 "이신영 조교사가 오늘따라 되게 예쁜 것 같다"며 "조교사들이 기수복을 입고 경주에 뛰니 새로운 느낌이다"고 했다. 또 다른 경마팬 역시 "감회가 새롭고 옛 생각이 많이 난다"며 "사실 안병기 조교사 팬이다. 전성기 시절 뛰던 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렛츠런파크 서울 최인용 본부장은 "신규 고객들에게는 이색적인 볼거리를, 오래된 경마고객들에게는 잊지못할 추억을 선물할 취지로 추진했다"며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렛츠런파크 서울의 대표 이벤트가 될 수 있게 만전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보순기자 bsshi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