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출입은행에 대한 청와대·정부의 제재와 조사가 이어지면서,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의 거취나 입지 변화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청와대가 수출입은행 경영진의 출장 내역을 전례 없이 직접 조사하는가 하면 기획재정부는 '모뉴엘 대출 사기'와 관련해 수출입은행 임직원을 무더기로 징계하는 등 잇따라 수출입은행에 칼을 들이대는 모양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황제출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행장이 타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압박을 이 행장의 거취와 연관 짓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이 행장은 민간 출신 금융인으로 대한투자신탁 사장, 한빛은행장, 우리금융지주 부회장, 우리은행장, 금융통화위원 등을 역임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서강대 동문으로 금융권의 대표적 친박(親朴) 인사로 알려져 있다.
▶이덕훈 행장 '황제출장' 논란 청와대서 조사 왜?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수출입은행 부행장급까지 해외 출장 내역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난해 이덕훈 행장의 '황제출장' 논란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이 행장은 취임후 1년 7개월 동안 해외 출장비용으로 10억원 가까이 지출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홍종학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수출입은행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이 행장의 18차례 해외출장에 쓰인 돈은 9억9248만원에 이른다. 이는 같은 기간 사용된 수출입은행 해외출장경비 42억6736만원의 23.3%에 달했다. 더욱이 이 행장은 한 번 출장당 약 724만원의 항공료와 1박 당 평균 69만원의 숙박비를 사용하면서 호화 출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논란이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입은행은 지난달 25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요청으로 지난해 부행장들의 해외출장 내역을 제출하면서 또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11일 취임 2주년을 맞은 이 행장의 출장비 논란은 지난 2월초 불거진 방석호 아리랑TV 사장의 호화 출장 논란과 더불어 공기업 방만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고 있다. 방 사장은 지난해 9월 미국 출장 현장에서 최고급 차량을 빌리고 가족과 함께 호화 레스토랑과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사적 경비를 공식 출장비로 처리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지난달 사퇴했다.
수출입은행의 청와대 조사에 대해서는 설왕설래하고 있지만 이 행장과 연결시키는 분석이 대다수다. 아울러 수출입은행 측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직접 조사 전례가 없었다"고 밝힌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번 조사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특히 지난달 산업은행장 교체 이후 금융공기업을 중심으로 인사태풍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 행장 주변을 정권 차원에서 조사했기 때문에 단순하게 '공기업'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와 관련, 수출입은행 측은 "청와대에서 은행장과 전무이사, 감사가 아닌 부행장들의 출장 자료를 요구했다"며 이 행장의 황제출장 논란과 연관 짓는 시각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업계는 청와대의 후속조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든 불어 닥칠 것으로 보고 이 행장과 수출입은행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모뉴엘 사태' 무더기 징계…이 행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조사 뿐만 아니라 지난 8일 기획재정부가 2014년 모뉴엘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수출입은행 임직원 57명에 대한 징계조치안을 통보했다. 이는 수출입은행 출범 이래 최대 규모의 징계다.
2014년 10월 드러난 모뉴엘 대출사기는 PC제조사 모뉴엘이 수출입은행의 우수 중소기업 지원프로그램인 히든챔피언을 악용, 분식회계와 수출서류 위조 등을 통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5년여에 걸쳐 3조 2000억원 규모 대출사기를 벌인 사건으로, 수출입은행은 1000억원대의 대출손실을 입었다. 이와 관련 모뉴엘로부터 9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고 대출편의를 봐 준 대가로 수은 전 간부가 최근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검사과정에서 가장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수출입은행은 당시 금융감독원의 제재 권한이 없어 개선 13건으로 제재가 마무리된 바 있다. 이에 따라 뒤늦게 기재부가 수출입은행 임직원에 대한 징계조치를 통보하면서 그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는 '한국수출입은행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한 데 따른 것이다. 이전에는 수출입은행 임직원의 업무부실이나 내부비리에도 정부가 관련자를 처벌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개정안은 수출입은행 임직원이 정부의 경영건전성 관련 명령을 위반하거나 건전 경영을 해칠 경우 임원은 업무집행정지·해임·경고, 직원은 면직·정직·감봉·견책 등으로 문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이런 행위가 뒤늦게 드러나 해당 임직원이 퇴직한 경우라도 은행의 인사기록에 남기도록 했다.
기재부는 모뉴엘 대출비리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현직 임원 2명은 직접 징계처분을 내리고, 55명의 직원에 대해서는 수출입은행장이 직접 조치하도록 했다. 수출입은행측은 "법률검토와 당사자 소명기회 제공 등의 절차를 거쳐 빠른 시일내에 인사위원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징계가 시기상 청와대의 출장비 조사와 맞물려 국책은행에 대한 기강잡기 차원, 혹은 이 행장에 대한 압박용이 아니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 행장은 모뉴엘 대출사기가 집중될 당시 은행장이 아니어서 이번 제재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이 행장 취임 이후에도 모뉴엘은 4개월간 수출 서류 위조를 계속했고, 수사과정서 이 행장이 발탁한 비서실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행장이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책은행에서 부실과 비리 의혹이 이어지고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하며, "최근 수출입은행에 대한 정부의 잇단 조치가 이덕훈 행장의 거취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주목된다"고 밝혔다. 업계 일각에서는 방석호 전 사장처럼 임기만료전 사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김소형 기자 compac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