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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진영이 밝힌 노년의 멜로, 그리고 '할배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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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최보란 기자] "이렇게 달달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

배우 정진영(52)이 안방극장에 때 아닌 설렘을 안겼다. 그것도 70대 노역으로 말이다.

정진영은 종영을 앞두고 있는 MBC '화려한 유혹'에서 전직 총리인 강석현 역을 맡아 노인 분장을 하고 극 중 딸뻘인 신은수(최강희)와 부부로 호흡했다.

자칫 자극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이 러브라인이 '화려한 유혹' 속 어떤 커플보다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석현이 보여준 노년의 순애보 덕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성 석혁이 이따금씩 은수에게만 보이는 격정적인 질투와 진실한 고백, 애틋한 눈빛은 여심을 제대로 흔들었다.

그렇게 예상못한 석현의 매력에 시청자들은 빠져들었고, '할배파탈'(할배+옴므파탈)이라는 신조어를 낳기에 이르렀다.

정진영은 '할배파탈'이라는 시청자 반응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라며 "제작사에서 그런 반응이 있다고 말씀을 하더라. 신기하다. 배우는 대본을 기반으로 연기하는 것이라, 주어진 역에 충실 했을 뿐이다. 강석현이라는 인물이 왜 그렇게까지 매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얼떨떨한 듯 소감을 밝혔다.

'화려한 유혹'에서 그가 연기한 석현은 '순애보' 그 자체였다. 처음엔 옛사랑을 백청미(윤해영)을 닮아서 은수에게 눈길이 갔다. 이후에는 식구들의 구박에 대한 연민, 그리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이 사랑으로 커져 있을 때 시청자들은 이미 석현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은수에 대한 사랑은 실상 과거의 사랑 청미에게서 전이된건데. 어느 순간부터 은수에게 곧장 마음이 가더라. 최강희라는 배우에게서 자연스럽게 은수가 느껴졌다. 서로 마음을 교환하는 듯한 장면이 있었는데 편하게 서로 표현했던 것 같다. (최)강희 씨 눈이 굉장히 예쁘다. 멜로는 눈을 바라보면서 해야하는데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후반부에는 저의 외사랑인데, 그건 어쩔 수 없는거고. 하하. 저보다는 강희씨가 힘들었을 것. 은수가 저를 이용하는 것이 돼 버렸으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만 연기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정진영은 멜로 연기가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최강희와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잡아가고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강희가 그려낸 은수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느꼈고, 덕분에 더욱 깊은 멜로신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최강희가 개성있고 독특하다. 은수를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다른 배우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덕분에 멜로 연기할 때 감정이 힘들지 않았다. 석현이 심장 수술을 한 뒤 휠체어에서 담요를 짚어 던지고 은수를 확 껴안는 장면이 있었다. 지문에는 힘겹게 일어나면 은수가 와서 안는거였다. 내 생각엔 석현이 코마 상태에서 은수를 생각하면서 깨어나는데, 은수한테 달려가고 싶을 것 같았다. 감독님한테 '달려가면 안 되냐' 했더니 그건 상황상 힘들 것 같다고. 마침 소품팀이 담요를 줘서 좀 더 격정적인 장면이 나온 것 같다. 그런 장면 장면이 만들어지게 되더라. 그러면서 은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점점 더 커졌다."

사실 정진영은 강석현과 신은수의 멜로가 이렇게까지 농도 짙게 다뤄질 줄 예상치 못했다. 석현 자체가 치매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시한부 캐릭터였고, 캐스팅 단계부터 제작진으로부터 중도 하차한다는 사실을 들었던 터였다.

"원래 알고 있던 회차보다 오래 나왔다. 더 살았다. 아마 시청자들 호응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석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야수가 됐지만 노년에 모든 잘못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결국 반성하면서 죽는 인물이다. 그런 흐름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멜로가 훨씬 강하게 표현됐다. 달달하고 그런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떡볶이신'이나 '바둑신' 등에서 놀라기도 했다"

강석현 역할을 통해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정진영의 새로운 매력이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거절했었다고.

"4부까지 대본과 시놉시스를 보고 나서는 솔직히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는데, 김상협 감독과 인연이 있어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보게 됐다. 근데 작가님을 모시고 왔더라. 일종의 반칙이죠. 근데 아무래도 술을 마시다보면 제작진 입장에서는 캐스팅을 위해 계속 유혹을 할테고. 시놉이나 대본에 묘사 안 된 부분 설명도 하더라. 강석현이라는 인물이 악역이라 판단했는데 그렇지 않다더라. 복잡하고 깊은 인물이다. 어떨 땐 좋게도, 어떨 땐 나쁘게 그려지는데 그게 긴장감을 가져갈거라고. '도전해 볼 만하다' 생각됐다. 차이영 작가님이 '멜로가 아주 진해요. 무지하게 멋있는 인물이예요'라고 했지만 별로 안 믿었다. 근데 생각보다 훨씬 멋있게 그려주신 것 같다. "

원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캐릭터였지만, 그것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외형이야 분장을 하면 되는 것인데다, 영화 '평양성'으로 연기 해 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을 앞둔 석현이라는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 어떤 순간들이 있을까 상상하고 연구했다. 강석현이라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멜로라는 틈이 보였다. 그가 갖고 있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허망함이 보였고. 과거의 잘못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이 보였다. 석현에게 파고드는 틈이 보였다."

석현은 강하지만 외롭고 연약했으며, 악하지만 한편으로 선했다. 차가워보였지만 사랑 앞에 한없이 순정적인 남자였다. 그런 복잡한 캐릭터였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건 치매 연기였다.

"보통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게 보편적이지만, 정진영은 석현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치매에 걸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굉장히 힘들었다. 사랑은 경험해 봤지만 치매는 경험하지 못한 거니까. 석현이 치매 증상을 보일 때 그 끝이 항상 은수에 맞닿아 있었다. 결국 석현에게는 치매 자체도 멜로였던 셈이다. 그런 지점들이 되게 어려웠다."

'화려한 유혹'에서 석현은 은수와 진형우(주상욱)가 손잡고 무너뜨리기 위해 애쓰는 악인이었다. 많은 시청자들은 석현을 향한 복수가 이 드라마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하지만 석현은 은수를 만나 지난날을 반성하며 떠났고, 그의 죽음은 드라마 속 인물들을 슬프게 했다. 사실 석현의 죽음은 예정보다 늦어진 것이었지만, 시청자들에게는 결말을 향한 물음표를 크게 던진 사건이었다.

"나도 결말이 어찌 될지 잘 모르겠다. 일부러 마지막 대본도 읽지 않았다. 굉장히 궁금하다. 언뜻 뻔한 통속극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느 드라마와 다르게 가는 작품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초강적(SBS '육룡이 나르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전한게 아닐까. 50부를 만드려면 대하 서사 드라마가 아니면 끌고 가기 어렵다. 그런데도 '화려한 유혹'은 구성에 항상 반전이 있었다. 덕분에 거대한 서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지 않았음에도 흥미로운 전개가 된 것 같다."

'여느 드라마와 달랐다'는 그의 말에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배우 개인적인 성과면에서도 만족하는 작품인지 묻자, 정진영은 "작가님이 잘 써주셨고. 감독님이 잘 연출해 줬고. 저도 절실하게 연기했다. 굉장히 캐릭터가 깊이 있는 인물로 표현이 된 것 같다. 연기에서는 절대로 만족한다고 말 못하죠. 연기한 걸 보면서 여전히 뜨끔한 지점들은 있지만, 그럼에도 절절한 감정 표현을 한 것 같다. 맞냐 틀리냐의 얘기가 아니라,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답했다.

정진영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 '화려한 유혹'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함께 호흡한 배우들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강석현이 애초 기획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바꿔 말하면 다른 캐릭터들의 기회가 줄어 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예련이가 악역으로 가잖나. 힘들었을텐데 잘 버티고 하더라. 악역인줄 알고 시작했겠지만, 구체적인 묘사가 될수록 안정된 연기를 해줬다. 의젓하다. (주)상욱이 또한 착하고 댄디하고, 스마트한 배우다. 심성이 착하고. 상욱이도 예상치 못했을거다. 강희와 상욱이 강렬하게 붙어야하는데, 멜로가 제 쪽에 치중해 있으니까 서운하고 당혹스러웠을거다. 그런데도 그걸 표안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 김창완 형님은 또 어떤가. 극악무도한 악역을 멋지게 해주셨다. 사실 배우야 그저 맡겨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닌가. 내게는 비교적 좋은 일이 많았던 드라마였으나, 어쩌면 다른 배우들에게는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다."

정진영은 '화려한 유혹'을 촬영하면서 "야구선수가 어느 날 공이 수박만 해 보이는 날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컨디션'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영적인 컨디션'이야말로 어쩌면 배우로서 쌓아온 정진영의 내공, 그를 적재적소에 활용한 제작진의 연륜이 빚어낸 합작품이 아닐런지.

"이제 젊은 캐릭터는 못하겠지. 그럼에도 나이 먹은 배우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량이 얼마든 비중이 어떻든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앞서 말한 그 장벽의 흠이 더 잘 보인다.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는 배역이 늘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연기를 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혹시 알겠나. '할배파탈'을 뛰어넘는 정진영의 격정 멜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세상 일이란 게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제의가 얘기가 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도전할 만한 것 같다."

ran61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