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어딘가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가 시선을 잡아끈다. "젖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 봐요." 배우 심은경이 수줍어하며 배시시 웃었다. 어느덧 우리 나이로 스물셋.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지금 심은경은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의 순간들을 담대하게 겪어내는 중이다.
영화 '널 기다리며'는 그 길목에서 만난 작품이다. '호러 마니아'를 자처하는 심은경이 "오래 전부터 선망해 왔던 스릴러 장르"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일본 영화 '고백', 또 제가 좋아하는 '렛미인'처럼, 대놓고 잔인한 게 아니라 감정 묘사로 사람 심장을 옥죄어 오는 그런 영화들 있잖아요. 저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영화는 연쇄 살인마의 손에 아빠를 잃고 15년간 복수를 계획해온 소녀 희주가 감옥에서 출소한 살인마를 뒤쫓아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심은경이 캐스팅되면서 주인공 성별이 여자로 바뀌었고, 폭력성은 약해진 대신 감성이 짙어졌다. "희주는 순수성과 잔인성을 모두 지닌 아이예요. 희주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당연하다는 듯 일상 연기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복수를 꿈꿔온 소녀의 울분이 섬뜩하고 슬프게 다가갔으면 하는 생각에 후자를 택했어요. 관객들께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해요."
심은경은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찬찬히 곱씹다보면 캐릭터의 고난이도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여리고 순진한 모습 이면에 괴물을 키우는 소녀.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내면의 아우라로 광기를 드러내야 하는 연기. 경력 13년차 심은경에게도 풀기 어려운 숙제였을 테다. "감독님께서 희주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고 하셨어요. 평생 복수만 생각하면 살아온 아이니까 죄책감을 못 느끼는 거죠. 처음 경험하는 캐릭터라는 이유로 선택했지만, 연기할 때 힘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공감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매순간에 집중해서 희주의 날선 감정들을 그대로 표현하려 했어요."
심은경은 "영화에서 내 부족함이 보여서 부끄럽다"며 움츠러들었다. 또 메인 포스터를 가리키며 "여기에 내가 등장해도 될 만큼 연기를 잘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폭주하는 여러 인물 사이에서 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복수심을 날카롭게 벼리는 희주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칭찬 뒤에 따라온 뜻밖의 '자책'이다. 하지만 심은경 나이에 상업영화 한편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써니'와 '수상한 그녀'를 통해 얻은 '최연소 흥행퀸' 수식어가 결코 과하지 않다.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이후로 한동안 분간을 못했어요. 앞만 보고 살았죠.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과 연기를 진짜 잘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기더라고요. 좋은 평가를 받은 건 분명 행복한 일이지만, 그게 저 자신을 옭아매기도 했어요. 순수하게 연기해야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건데, 그러지 못했던 시간들이 정말 후회스러워요."
심은경은 "한때 방황을 했다"고 고백했다. 심은경이 직접 언급하지 않았고 굳이 되묻지도 않았지만, 아마도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 출연 당시의 마음고생 얘기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들에 일희일비 하기도 하고, 나를 얼마만큼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지 화가 나기도 했어요. 이대로 연기를 계속해도 되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 고민을 많이 했죠. 하지만 이젠 담담해지려고 해요.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그런 얘기들은 하나의 의견일 뿐, 제가 실제로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요."
호되게 '성장통'을 앓았던 듯하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심은경이 대견해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감기를 앓고 나면 면역력이 강해지듯, "과도기에 서 있는" 심은경에겐 분명 약이 될 테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했지만, 그 반대로 저 자신을 챙기는 법은 몰랐어요. 아르바이트도, 연애도 못 해봤고, 스트레스 푸는 방법도 몰라서 그냥 꽁꽁 싸매고 있었어요. 앞으로 자신과 주변을 보살피면서 살고 싶어요. 배우 심은경의 길도 있지만, 인간 심은경의 길도 있는 거니까."
최근 심은경은 일상의 소소한 변화들을 즐기고 있다. 혼자 여행도 가고, 하루 종일 극장에서 실컷 영화를 보기도 한다. '캐롤'은 주인공 루니 마라에 매료돼 세 번이나 봤다며 눈빛을 반짝였다.
방황의 시간 이후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결심으로 선택한 영화들도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널 기다리며'부터 '궁합', '서울역', '조작된 도시'까지 부지런히 찍었다. 독립영화 '걷기왕' 촬영을 마치면 '특별시민'에서 대선배 최민식을 만난다. 차기작 얘기가 나오자 "무척 기대된다"며 심은경이 살짝 들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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