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15일이었다. 한화 소속이던 박찬호(43)가 포항구장에서 취재진과 마주했다. 전날 6이닝 7피안타 4실점으로 시즌 7패(5승)째를 당한 '코리안특급'이었지만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역사적인 포항구장 개장 경기에 선발 등판한 투수가 박찬호였다. 그는 "승패를 떠나 날 응원해준 포항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또 그는 이날 6이닝을 소화하며 2006년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136⅔이닝) 시절 이후 6년 만에 100이닝을 돌파했다. 국내에서는 송진우에 이어 마흔 살의 나이로 100이닝 이상을 던진 두 번째 투수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박찬호는 100이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100이닝 이상을 놀라워하는데 사실 특별한 기록은 아니다. 랜디 존슨이나 그렉 매덕스는 마흔 살이 넘는 나이에도 200이닝을 던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야구 환경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100이닝 이상이 주목 받는 건 노장 투수들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찬호는 "선수가 스스로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한다"며 "베테랑과 고참들을 예우해주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어린 선수들이 보고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
KBO리그에 던진 묵직한 메시지였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시속 140㎞ 후반대의 직구를 던지는 투수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핵심은 기량.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고참을 쓰지 않는 사령탑은 없다. 팀의 미래를 내다보는 리빌딩은 고참의 기량과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올해 이호준과 이승엽의 존재감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2012년 박찬호처럼 불혹의 나이에, 대체불가 선수로 평가받으며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이호준은 지난 13일 연봉 대박을 터뜨렸다. 2013년 NC 유니폼을 입으면서 3년 FA 계약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협상 테이블을 차렸고 4억5000만원에서 3억원 오른 7억5000만원을 올 시즌 수령한다. 협상은 배석현 NC 단장이 직접 진행했다. 팀 내 최고 대우는 물론 타구단 토종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도 자존심을 살려주겠다는 게 구단 방침이었다.
이호준은 지난 시즌 131경기에서 타율 2할9푼4리에 132안타 24홈런 110타점을 올렸다. 남들이 은퇴할 시기지만 빠른 공도 잡아 당겨 좌월 홈런으로 연결하는 순발력과 힘을 과시했고, 커리어하이인 2004년 112타점에 고작 2타점 부족한 타점을 쓸어 담았다. 이에 배석현 단장은 "여전히 그라운드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다. 실력에 맞는 연봉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이보다 앞선 지난해 11월28일 2년간 36억원(계약금 16억원, 연봉 10억원)을 받는 조건에 FA 계약을 했다. 지난해 26홈런과 함께 통산 400홈런을 넘어선 마흔 살의 거포를 팀이 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 그는 전성기에 배트 스피드가 느려지자 높게 들었던 방망이를 어깨에 눕히는 변신을 시도했다. 타석에서 보폭도 줄였다. 시즌이 개막하자 경기장에 가장 먼저 나타나 특타를 자청한 이승엽은 이제 한일 통산 600홈런에 25개를 남겨 놓고 있다. 올 시즌 안에 대기록이 예상된다.
결국 이승엽, 이호준에게 '고참을 예우해주는 문화'는 그리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마흔 살의 이들은 기량으로 제칠 후배들은 팀 내에 아직 없다. 올해 두 명의 노장이 어떤 기록과 명장면을 만들어갈지 벌써부터 주목된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