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보다 더했었어."
지난 19일 충북 단양국민체육센터에서 열린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 남자단식 8강전 후 관중석에서 '후배' 장우진(20·KDB대우증권)이 '대선배' 주세혁(35·삼성생명)을 향해 쭈뼛쭈뼛 걸어왔다. 8강전은 역전 드라마였다. 장우진이 1-2-3세트를 내리 따냈고 4세트 4-8 상황에서 주세혁의 역습이 시작됐다. 올해 아시아선수권에서 장지커를 잡았던 장우진의 '날선 창'을 '레전드 깎신' 주세혁의 무적 방패가 신들린듯 막아내면서 장우진이 흔들렸다. 다 잡은 줄 알았던 게임에서 예기치않은 위기에 몰리며, '멘탈'이 깨졌다. 결국 3대4로 역전패했다. 분을 참지 못했다. 경기구를 깨뜨렸고, 라켓을 집어던졌다. 대선배와의 경기에서 빚어진 돌발 상황이었다. '스승' 김택수 대우증권 감독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후배를 향해 주세혁은 툭 한마디만 던졌다. "야! 나는 옛날에 너보다 더했었어." '대인배'였다.
주세혁은 스무살 후배 장우진의 행동을 같은 '선수의 마음'으로 이해했다. "승부욕이다. 3세트를 내리 이기다가 역전 당한 상황이다. 스스로 제어가 안됐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고 나면 후회 많이 할 거다. 나도 그랬다"고 했다. 주세혁 역시 스무살 시절, 이겨야할 경기를 놓치고 분한 마음에 라켓을 집어던진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우진이보다 훨씬 심했다"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틀림없이 나아질 거다. 나는 실업 3~4년차쯤 되니 좀 나아지더라. 승부욕이 과하면 경기를 망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승부욕, 이기고 싶은 독한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좋은 선수가 못 된다. 그 둘 사이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 마음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우진이는 좋은 선수다. 다음에 대화를 좀 하고 싶다"고도 했다.
실업 1년차, 어린 선수가 한국탁구를 대표하는 '대선배'와의 경기에서 저지른 돌발 행동이라서 현장의 비난은 더 거셌다. 그러나 당사자인 주세혁은 '쿨'했다. 오히려 후배의 실수를 이해하고 감쌌다. "나보다 15년 가까이 어린 선수지만, 우리는 선수 대 선수로 만난 것이다. 탁구에서 상대의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경기때 우진이를 어린 선수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력, 멘탈 모든 면에서 '국가대표 맏형' 주세혁의 품격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주세혁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를 놓을 수 없게 하는 몇 안되는 선수다. 세계 최고의 현역 수비수인 주세혁의 가치는 국제 무대에서 더욱 빛난다. 세계 탁구팬들은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다 깎아내는 '신공' 랠리, 포기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력을 지닌 이 선수를 사랑한다. 중국선수들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현역 한국선수, 가는 곳마다 뜨거운 사인 공세, 사진 촬영 요청에 시달리는 몇 안되는 '월드클래스' 한국 탁구선수다.
주세혁은 이날 세트스코어 0-3 상황에서 거짓말같은 대역전극을 이끌어냈다. '스무살 재능'을 상대로, 탁구는 단지 '날선 드라이브'가 아니라 '날선 정신'이라는 교훈을 몸소 가르쳤다.
서른다섯살 주세혁은 "내년 리우올림픽을 마지막 올림픽으로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종합선수권에 나설 기회도 2번뿐이다. 국가대표로 뛸 수 있는 경기도 총 30~40번 남았다"라며 한경기 한경기의 소중함과 절실함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세트스코어 3-3, 역전의 7세트, 국가대표 후배 조언래에게 "저 상황에선 쫓기는 공격수보다 막아내는 수비수가 심리적으로 유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지난 10여년간 대표팀에서 주세혁과 한솥밥을 먹었던 조언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건 수비수가 아니라, '세혁이형'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죠." 단양=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