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경륜의 승패를 가르는 절대 요소가 아니다.
똑같은 선수들이 다시 만나도 명암이 엇갈릴 수 있는 게 경륜이다. 작전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 때문에 팬들은 선수들의 기량, 성적 못지 않게 경주 운영능력을 꼼꼼히 체크할 수밖에 없다.
경륜 초기 기어는 3.3이 대세였다. 한때 4.5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 기간 경륜 훈련원에선 한 바퀴 선행을 소화할 수 있는 자력 승부 능력을 강조했다. 선수들 역시 근력향상에만 몰두했었다. 덕분에 전개는 매우 빨랐지만, 경륜 특유의 반전과 축을 놓고 물고 물리는 마크맨들의 접전이 점점 사라진 게 사실이었다.
올 시즌 변화가 왔다. 올해부터 적용된 기어 상항제가 무르익으며 선행을 승부수로 하는 '정통파' 못지 않게 마크 전환 등 기술을 앞세우는 '테크니션' 즉 두뇌플레이형들이 급증하는 추세다. 야구로 치면 강속구에 의존하는 '파워 피쳐'가 득세하던 세상에 각종 변화구를 장착하고 제구력을 앞세운 '기교파'가 맞서는 셈이다. 기교파 선수들의 출현으로 경륜의 재미는 더욱 커졌다.
경륜에도 엄연히 테크니션의 계보가 있다. 허은회(1기) 강광효 권태원(이상 2기)이 '선구자'를 자처했다면 윤진철(4기) 김우년(5기·은퇴)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경륜 황제' 엄인영(4기), 박일호(10기) 이후엔 이렇다할 선수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기어 광풍'을 몰고온 엄인영 조호성(11기) 노태경(13기) 이욱동(15기)이 절정기를 구가했다. 이때는 모든 선수들이 '고기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경기도 광명스피돔에서 펼쳐진 특선 결승에서는 랭킹 1위 이현구가 수도권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두뇌플레이어의 대명사로 꼽히는 김형완에게 일격을 당했다. 당시 김형완은 두개의 라인이 다툼을 벌이는 사이 특유의 동물적 판단과 전환 능력을 앞세워 전세를 뒤집었다.
올 시즌 기세가 전체적으로 좋지 못했던 박용범은 2주전 결승 우승과 함께 모처럼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랑프리를 앞둔 시점이라 더욱 주목되는 성적이다. 박용범의 몸싸움 능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 최고 레벨이다. 여기에 조종술이나 상황에 따른 전환능력, 막판 돌파력. 특히 라인의 선두나 후위에서 자유롭게 공수를 조율하는 능력 역시 당대 최고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밖에 전년도 그랑프리 결승진출로 화제를 모았던 황승호 역시 기술과 막판 결정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존재로 꼽힌다.
경륜 전문가들은 "최근 신진 선수들을 중심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이제 단순히 힘만 가지고는 그 한계가 올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상대나 상황에 따른 대응능력이 일품인 테크니션 즉 두뇌플레이어들을 주목해 봐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