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생애 첫 성인 대표팀에 승선한 허경민(25·두산 베어스)에게는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포스트시즌 내내 엄청난 활약을 한 허경민은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극적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몸이 좋지 않은 삼성 박석민 대신 김인식 대표팀 감독이 선택한 3루수가 허경민이었다. 그는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23안타를 몰아치며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을 작성했다. 한국시리즈에서 특히 19타수 9안타, 타율 4할7푼4리에 1홈런 6타점 4득점으로 펄펄 날았다. 한 번 불붙은 타격감은 쿠바와의 슈퍼시리즈에서도 식지 않았다. 1차전에 교체 출전해 1타수 1안타, 2차전에서는 유격수로 선발 출전해 2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국제대회는 역시 쉽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8일 일본 삿포로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프리미어 12 개막전. 김인식 감독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한 황재균 대신 허경민을 7번 타자 3루수로 내보냈다. 스스로 "모험이다"라고 표현할만큼 파격적인 카드였다. 이날 일본 선발은 161㎞의 강속구를 던지는 오타니 쇼헤이(21). 경기 감각이 떨어진 황재균을 쓰느니 경험이 적지만 '기'가 좋은 허경민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승부처마다 그를 중심으로 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며 악몽 같은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먼저 수비다. 일본은 0-0이던 2회말 무사 1,2루 찬스를 잡았다. 선두타자 나카타가 스트라이크 낫아웃 폭투로 출루했고, 후속 마츠다는 우전 안타를 때렸다. 여기서 히라타가 친 타구가 3루 베이스 쪽으로 향했다. 높게 바운드가 되며 애매하게 날아갔다. 그런데 허경민 포구를 하려는 순간 공이 베이스 오른쪽 끝을 맞고 굴절됐다. 처리가 쉽지 않은 공이었다. 당시 허경민은 높게 튄 바운드를 잡아 5-5-3 병살 플레이를 시도하려는 듯 했다. 나름 바운드를 계산하며 타구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공은 굴절돼 외야 부근으로 굴러갔고 2루 주자 나카타는 그대로 홈을 밟았다. 한국은 계속된 위기에서 1실점을 더 했다.
수비에서의 아쉬움은 타석으로 이어졌다. 2회 잔상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듯 했다. 0-2로 뒤진 한국의 5회초 공격. 대표팀은 박병호의 2루타, 손아섭의 볼넷으로 무사 1,2루의 찬스를 잡았다. 오타니의 위력적인 직구와 포크볼에 꽁꽁 묶이다가 이날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가 위치했다. 공교롭게 타석에는 허경민. 김인식 감독은 보내기 번트를 지시했다. 쫓아가는 점수가 필요했기에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 한데 허경민이 오타니의 강속구에 번트를 성공하지 못했다. 몸쪽 높은 곳으로 날아온 초구에 파울, 2루째도 번트 파울이었다. 결과는 볼카운트 1B2S에서 낮게 떨어지는 포크볼에 헛스윙 삼진. 오타니의 '괴물'같은 피칭이 야속할 뿐이었다. 허경민은 결국 2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한 뒤 8회 세 번째 타석에 앞서 오재원과 교체됐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