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두려움'을 만든다. '괴물'이나 '귀신'이 두려운 존재로 여겨지는 건 실체를 확인해서가 아니라 무서운 모습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실체를 확인했을 때 더 두려워지는 존재들이 있다. 프리미어12 일본 대표팀의 에이스. 이제 만 21세의 프로 3년차 오타니가 그랬다. 명성이나 기록, 투구 영상이 아닌 실제로 본 오타니의 위력은 실로 막강했다. 진정한 '괴물'이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대표타자들은 오타니 앞에서 무기력했다. 마치 양떼 무리를 휘젓는 늑대같았다.
오타니는 8일 일본 삿포로돔에서 열린 프리미어12 대회 한국과의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 이미 일본 대표팀 고쿠보 히로키 감독은 오타니를 개막전 선발로 일찌감치 예고해놓았다. 확실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리고 오타니는 왜 고쿠보 감독이 '전력 노출'의 부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있게 선발을 공개했는 지 실력으로 입증했다. 아무리 분석을 했더라도 오타니의 공을 제대로 치기는 어려웠다.
이날 오타니는 1회부터 최고 161㎞의 불꽃같은 강속구를 마음껏 뿌려댔다. 2사후 김현수를 상대로 초구에 158㎞를 던지더니 2구째 161㎞를 찍었다. 3구도 159㎞가 나왔다. 오타니의 무기는 이런 불꽃 강속구만이 아니었다. 145㎞가 넘는 포크볼에 140㎞대 초반의 슬라이더, 120㎞대의 커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흔히 말하는 '사기 캐릭터'인 셈이다. 한국 타자들은 강속구 하나만 상대하기도 버거운 판에 오타니가 다양한 변화구까지 섞어던지자 전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사실 개막전이 열리기 전까지 한국 대표팀은 다양한 측면에서 오타니의 공략포인트를 찾으려했다. 기본적인 투구 영상자료를 기반으로 전력분석팀과 코치진이 그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어느 정도는 공략 포인트를 찾은 듯 했다. 김인식 감독은 "오타니가 매우 뛰어난 강속구와 포크볼을 갖고 있지만, 아직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런 점을 공략해야 할 것 같다"며 '국제대회 경험부족'을 지적했다. 또 이순철 코치도 "타자가 누상에 나가있을 때 슬라이드 스텝 투구 시 제구력이 흔들리는 면이 보였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간혹 주자가 있을 때도 와인드업으로 공을 던지기도 했다"며 오타니의 제구력 난조 현상을 짚어냈다.
타자들 역시 전력분석팀이 나눠준 자료와 투구 영상등을 보며 오타니 공략법을 마음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대호는 지난 7일 대표팀 훈련을 마친 뒤 일본 취재진에게 "오타니가 위협적인 공을 던지지만, 한국 타자들을 쉽게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박병호 역시 "투구 영상을 계속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고 밝혔다. 대표팀 주장인 정근우는 지난 3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훈련을 마치고 "확실히 대단한 공을 던진다. 그러나 한국 타자들도 강속구에는 적응이 돼 있다. 문제는 포크볼인데, 영상을 보니까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떨어지면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더라. 속지않고 잘 참아내는 게 관건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분석이나 공략법은 압도적인 구위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오타니는 이날 딱 6회까지만 던졌다. 그러면서 안타는 2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볼넷도 2개 뿐이었다. 대신 삼진은 10개나 잡아냈다. 2회 1사 후 박병호가 1-2루간을 꿰뚫는 안타에 이어 5회 선두타자로 나와 우익수 오른쪽에 떨어지는 2루타를 날렸고, 김현수도 4회 1사 후 우전 안타를 하나 쳤을 뿐이다. 다른 타자들은 오타니 공략에 실패했다.
압권은 5회초였다. 0-2로 뒤진 한국은 선두타자 박병호의 2루타에 이어 손아섭의 볼넷으로 무사 1, 2루의 황금같은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타석에 나온 7번 허경민은 처음부터 희생번트 자세를 취했다. 하위타선이 오타니의 공을 정타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한 한국 벤치의 정석 플레이다.
그런데 허경민이 번트자세를 취하자 오타니는 오히려 정면승부를 했다. 대신 이전보다 한층 더 빠르고 묵직한 공을 허경민의 몸쪽에 최대한 붙여 공격적으로 던졌다. 허경민은 번트 기술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오타니의 무거운 공에 배트가 연이어 밀렸다. 결국 파울 2개를 기록한 뒤 4구 만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계속해서 오타니는 강민호에 이어 대타로 등장한 나성범까지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해버렸다. 나성범은 한국 벤치가 기대를 걸고 내보냈지만, 불과 공 3개만에 선 채로 물러서야 했다.
이날 오타니가 6회까지 기록한 투구수는 91개. 이닝당 15개꼴로 경제적인 피칭이었다. 사실 더 길게 던질 수도 있었지만, 이미 스코어가 4-0으로 벌어진데다 뒤에 있는 불펜진의 힘, 그리고 향후 오타니의 등판 일정을 고려해 미리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오타니가 남긴 공포감은 한국 타자들의 뇌리속에 깊게 새겨질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포감'을 심어주고 유유히 물러났다.
삿포로돔(일본)=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