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A대표팀 감독(61)이 한국 축구와 만난 지 어느덧 1년이 흘렀다.
길이 엇갈릴 뻔했다. 지난해 8월 대한축구협회가 염두에 둔 1순위는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전 네덜란드대표팀 감독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협상과정에서 결렬됐다.
한 달 후인 9월 5일 신임 감독이 깜짝 발표됐다. 슈틸리케 감독이었다.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선수 슈틸리케는 화려했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거쳐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며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지목됐다. 10년간 독일 대표로 활약했다. 그러나 지도자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스위스, 독일, 코트디부아르, 카타르 등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축구협회는 슈틸리케 감독과의 협상과정에서 '축구 열정'에 높은 점수를 줬다. '숨겨진 원석'으로 판단했다. 9월 8일 입국, 이날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친선경기를 관전한 그는 10월 A매치 때부터 지휘봉을 잡았다.
꼭 1년이 지났다. 2015년 9월 8일(이하 한국시각), 슈틸리케 감독은 레바논에서 태극전사들을 지휘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G조 3차전이었다. 레바논 원정의 아픔이 환희로 탈바꿈했다. 3대0으로 완승하며 22년 만에 레바논 원정에서 빛을 봤다.
더 이상 물음표는 달리지 않는다. 한국 축구에 '진짜 슈틸리케 시대'가 열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에 이은 또 다른 마법이 춤을 추고 있다. '슈틸리케 마법'은 허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실패는 없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1년간 무려 20차례의 A매치를 소화했다. 14승3무3패, 70%의 승률을 기록했다. 코스타리카(1대3 패), 이란(0대1 패·이상 친선경기), 호주(1대2 패·아시안컵), 비교적 난적에게 패했다. 큰 실패는 없었다.
슈틸리케 감독의 첫 단추는 호주아시안컵이었다. 55년 만의 아시안컵 정상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준우승으로 연착륙에 성공했다. 1무2패로 쓸쓸하게 발길을 돌린 2014년 브라질월드컵의 아픔도 비로소 치유됐다. 시작이었다. 지난달 동아시안컵에서 7년 만의 우승컵을 선물하며 비상했다. 6월 시작된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에서는 3전 전승을 거두며 순항 중이다.
레바논전 원정 승리는 1993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벌어진 1994년 미국월드컵 아시아지역 1차예선(1대0 승) 이후 22년 만이다. 3경기 연속 무승(2무1패) 사슬도 끊었다.
슈틸리케 감독의 과제는 아시안컵과 월드컵이었다. 아시안컵을 넘어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왜 슈틸리케 마법일까
'신데렐라' 이정협(24·상주)의 탄생은 설명이 필요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고정관념을 깼다. 감이 아닌 눈으로 선수를 발굴했다. 이정협의 경우 화려한 기술, 이름값이 아닌 수비라인을 내려서게 하는 '고급 움직임'을 믿고 발탁했다.
그는 주말이 더 바쁘다. K리그 클래식(1부)과 챌린지(2부)를 샅샅이 누비며 '뉴페이스'를 찾고 또 찾았다. 일본도 다녀왔다. 유럽과 중동파를 향한 안테나도 곧추세웠다. 동아시안컵 우승은 슈틸리케 감독의 발품이 빚은 작품이다. 권창훈(21·수원) 김승대(24·포항) 등이 등장했다. 이재성(23·전북)과 정우영(26·빗셀 고베)은 6월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1차전 미얀마전에서 본격, 중용됐다. 라오스와 레바논으로 이어진 2~3차전에선 석현준(24·비토리아FC)과 황의조(23·성남)를 실험대에 올려놓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세상의 평가가 아닌 지엽적인 장점에 주목한다. '이 선수는 이 부분이 좋다'라는 철학이다. 슈틸리케 마법은 출발은 차원이 다른 시각에서 출발한다.
물론 당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채찍도 있다. 이번 2연전에 중동파는 맏형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곽태휘(34·알 힐랄)가 유일했다. 왜일까. 중동 리그의 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중동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도 분발을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K리그가 대우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골격의 완성, 전술이 요동친다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아시안컵에 이어 동아시안컵을 거치면서 팀의 골격이 완성됐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전술이 요동치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라오스전에 이어 레바논과의 원정경기에서도 기존의 4-2-3-1 카드를 접고 4-1-4-1 시스템을 꺼내들었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캡틴' 기성용(26·스완지시티)을 필두로 이청용(27·크리스탈팰리스) 손흥민(23·토트넘)으로 이어지는 'EPL 삼총사'가 공격의 열쇠다. 그리고 실험이다. 미얀마전에선 이재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번 2연전에서는 권창훈이 중심으로 이동했다. 라오스전에서 2골, 레바논전에서 1골을 터트리며, 2경기 연속골을 기록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에 홀로 포진한 정우영은 터프한 경기 운영으로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주축 선수들이 든든하기에 가능한 시나리오다.
기성용은 공격 2선에 위치, 윗선에서 공수를 조율한다. 이청용과 손흥민은 중앙과 측면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 공격을 전개한다. 검증된 구자철(26·아우크스부르크)도 어느 자리에서든 제몫을 소화할 수 있고, 장현수(24·광저우 부리)를 오른쪽 윙백으로 실험한 것도 눈에 띈다. 슈틸리케호는 '멀티 플레이어'가 대세가 됐다. 중앙 수비도 곽태휘 김영권(25·광저우 헝다) 홍정호(26·아우크스부르크) 등이 안정을 찾으며 더 탄탄해졌다.
다음달 8일 쿠웨이트와의 원정경기가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G조 4차전이다. 일찌감치 조 1위를 결정지을 수 없는 무대다. 슈틸리케 감독은 웃는다. 그는 레바논전 후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줄 부분을 보여주면 감독은 휴가나 다름없이 할 일이 없게 된다. 오늘 경기가 바로 그랬다"며 미소를 지은 후 "쿠웨이트 원정에 대한 부담이 줄었다. 물론 우리는 그 경기도 이기려고 준비하겠지만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은 어느 정도 덜어낸 것이 사실"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슈틸리케호는 안정과 실험, 두 축으로 월드컵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키를 쥔 슈틸리케 감독의 미소가 한국 축구의 오늘이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