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탑의 색깔에 따라 '캐릭터'가 달라지는 타순은 2번이다.
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타자를 원하는 감독은 발빠르고 정교한 선수를 2번에 배치한다. 그러나 공격적인 야구를 선호하는 감독은 장타력을 지닌 타자를 갖다 놓는다. SK 와이번스 김용희 감독은 후자에 가깝다. 공격적이면서도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야구를 원하는 감독이다.
올초 전지훈련서 김 감독은 2번 타순에 대해 "보통 2번은 번트를 잘 대고 작전수행능력이 좋은 선수가 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옛날 말이다. 지금은 타격이 좋아야 한다. 장타력도 있고 발도 빨라야 한다"며 김강민을 2번 타자로 기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4년 56억원에 FA 계약을 하고 첫 시즌을 맞는 김강민은 전지훈련부터 강도높은 훈련을 진행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김강민은 지난 3월 19일 kt 위즈와의 시범경기에서 도루를 시도하다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은 김강민의 이탈로 김 감독의 라인업 구상은 흐트러지게 됐다. 박계현 조동화 박재상 김성현 등이 2번 타순을 맡았다. 붙박이는 없었다. 김 감독은 상대팀 선발투수 등 상황에 따라 2번타자를 기용했다.
그러다 지난 5월30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부터 김강민이 출전할 수 있게 되자 그를 2번타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김강민은 첫 두 경기서 2번타자로 나선 뒤 곧바로 6번으로 내려갔다. 최 정 등 부상 선수가 속출하고 라인업 자체가 짜임새를 보이지 않자 김 감독은 다양한 라인업을 들고 나갔다. 이때도 붙박이 2번타자는 없었다. 후반기 들어서는 조동화가 주로 2번으로 나섰지만, 브라운이 톱타자로 나가면서 이명기가 2번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정권이 2번타자로 선발출전하고 있다. 김 감독은 지난달 31일 LG 트윈스와의 홈경기부터 4일 한화 이글스전까지 4경기 연속 박정권을 2번타자에 기용했다. 박정권은 4경기 동안 2안타씩을 때려내며 타율 5할(16타수 8안타)로 고감도 방망이 실력을 과시했다. 이 기간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렸고, 타점도 6개나 올렸다. 김 감독이 원하던 2번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박정권 본인도 "2번이 딱 내 자리인 것 같다"며 만족하고 있다. 사실 박정권은 그동안 타격감이 들쭉날쭉했다. 이 때문에 올시즌 두 차례나 2군을 다녀왔다. 지난 4월말 열흘 동안 1군서 제외된 박정권은 돌아온 뒤에도 타격감을 찾지 못했다. 두 번째로 2군으로 내려가기 전인 7월 4일까지 시즌 타율 2할6푼1리를 기록한 박정권은 후반기 시작과 함께 1군에 복귀했지만 타격감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30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2안타를 치면서부터 감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5경기 연속 2안타 행진을 벌였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찾은 게 타격감 회복의 원동력이다. 박정권은 올시즌 후 FA가 된다. 전반기 동안 압박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김 감독은 "심리적으로 뭔가 쫓기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다"고 했다.
팬들은 박정권을 향해 '가을 남자'라고 한다. 전반기 내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후반기, 특히 포스트시즌서 맹활약을 펼치기 때문인데, 올시즌에도 이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SK는 후반기 들어 팀타율 3할1푼4리를 기록중이다. 박정권이 2번타자로 자리잡으면서 타선의 짜임새가 높아졌다. 박정권의 역할이 커졌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