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배우 하정우는 한국영화의 '오늘'을 보여주는 존재다. 영화계의 시선과 관심이 향하는 곳엔 어김없이 그가 있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암살'까지. 당대 최고의 영화들엔 늘 하정우가 있었고, 하정우가 머물다 간 스크린엔 오래 지워지지 않을 일종의 '체취'가 남는다.
'암살'의 하정우는 하와이의 낭만적 향취로 기억된다. 그가 쏜 총구의 화약 냄새도 왠지 향긋할 것만 같다. 친일파 암살에 나선 독립군의 뒤를 쫓는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 엄혹한 시대와 야합하거나 혹은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주변부를 겉돈다. 그러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과 얽히면서 두 발을 땅에 딛게 되고 암살 사건에 깊이 연루된다.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낭만적인 대사와 유머, 그리고 특유의 여유로움은 빛을 잃지 않는다.
하정우는 "시간 대비 굉장히 효율적인 캐릭터"라는 유머러스한 말로 하와이 피스톨을 설명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20분이 지나서야 처음 등장하는데, 관객들로 하여금 기다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는 얘기다.
그는 하와이 피스톨이 '멋있다'는 반응을 얻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그럴싸한 이름의 착시효과"와 "등장만 해도 관객들이 웃을 준비를 하는 오달수의 아우라"다. '플러스 알파'로 '베를린'에 이어서 다시 만난 전지현과의 "이뤄질 듯 말 듯한 애틋함"도 한몫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하와이 피스톨에는 하정우라는 배우가 평소 보여주는 어떠한 태도 같은 것이 투영돼 있음을 발견한다. 연출작 '허삼관' 촬영을 마친 다음날 곧바로 중국 상해로 넘어가 '암살' 촬영에 합류한 하정우는 혼란스럽고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그대로 가져다가 캐릭터에 녹여냈다. "이미 한 달 이상 호흡을 맞춘 촬영장에 저 홀로 뒤늦게 들어갔어요. 쉬고 싶었지만 정말 이를 악물고 간 거예요.(웃음) 다른 배우들은 최동훈 감독의 전작에서 서로 한번씩 만났는데 저만 처음이라 용병 같기도 했어요. 겉도는 듯한 저의 상황을 지우지 않은 채 연기했죠. 그게 더 하와이 피스톨스럽다고 해석했어요. 사실은 그냥 갖다 붙인 얘기예요.(웃음)"
그는 영화 '추적자' 때 감기몸살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심리분석 프로파일러에게 취조 당하는 장면을 촬영했던 예를 들었다. "몇몇 문제들 때문에 촬영이 며칠간 지연됐던 터라, 더는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극중 캐릭터도 밤새도록 취조에 시달렸을 테니 피곤할 거야, 목소리도 잠기고 집중력이 떨어지겠지, 그러니 내 모습 그대로 연기하자고 생각했죠. 그 이후론 신체의 낯섦이나 피곤함을 담아낸 연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정우 특유의 느슨함과 마초성은 하와이 피스톨의 개성으로 변주된다. 하정우는 "그 친구는 좀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다른 캐릭터들은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재창조됐지만,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오달수)은 다분히 영화적인 캐릭터예요. 어쩌면 최동훈 감독의 전작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죠. 그래서 모든 게 허용된다는 생각으로 연기톤도 좀 툭툭 던지듯이 잡았어요. 제가 끌고 가는 영화였다면 준비할 게 많았겠지만, 하와이 피스톨은 섬처럼 동 떨어진 인물이라 개성을 부여하는 게 가능했던 거 같아요."
2편의 연출작을 선보인 '감독'으로서도 이번 영화를 통해 얻은 게 많다. '허삼관' 이후 연출 방향과 접근법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데 그에 대한 해법을 최동훈 감독을 통해 발견했다고 한다. "저는 감독님이 굉장히 치밀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마음으로, 열정으로 영화를 찍으시더군요. 그래, 바로 저 것이야, 마음으로 찍어야지, 나는 왜 영화를 머리로 찍은 걸까….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어떤 감정으로 영화를 대했느냐의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죠."
하정우는 배우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다. "속이 비어 있으면 무얼 먹어도 행복하지 않냐"며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아직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때 '공포심'을 느낀다고 한다. 공연 시작을 앞두고 대사를 못 외워 고통받는 악몽도 종종 꾼다. 연기력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하정우의 뜻밖의 고백이다. 그는 '기본'에 이어 '겸손함'과 '겸허함'이란 단어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왜 외롭게 괴물이 되려 하는 걸까. 처음엔 저를 괴물처럼 봐주는 시선이 좋았어요. 괴물이니까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겸손하고 겸허하게 인간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야 더 많은 걸 들을 수도, 담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