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프러포즈, 배우 임수정에게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쓴 시나리오"라는 말이었다. 진심 어린 고백의 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고,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은 듯" 감동이 밀려왔다. 그렇게 임수정을 유혹한 그 영화 '은밀한 유혹'은 지난 4일부터 극장에서 관객을 유혹하고 있다.
스크린으로 만나는 임수정, 참 오랜만이다. 2012년 '내 아내의 모든 것' 이후 3년 만의 복귀. 독설을 입에 달고 살던 까칠한 아내로 성공적인 연기 변신을 했던 임수정은 신작 '은밀한 유혹'에서 돈과 사랑에 흔들리는 위기의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사채 빚에 시달리던 여자는 마카오 카지노 그룹 회장의 비서로부터 '회장과 결혼한 뒤 재산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을 받고 인생을 건 위험한 도박판에 뛰어든다. 임수정은 배신과 음모 속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데렐라의 뒤틀린 욕망을 담대하게 그려냈다.
"저를 위한 시나리오라는 얘기에 마음이 끌리긴 했지만, 캐릭터가 겪어야 할 감정이 너무나 파란만장해서 조금 겁이 났어요. 지문에 디렉션이 많지 않기도 했고요. 그런데 덜 친절한 그 시나리오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어요. 특히 글 사이에 흐르는 클래식한 정서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드라마나 영화 출연을 앞둔 배우들은 선입견을 가질까 봐 원작을 보지 않는 편인데, 임수정은 이 영화의 원작인 1950년대 프랑스 소설 '지푸라기 여자'를 구해서 읽었다. 소설의 비극적인 결말과 달리 영화에선 주인공을 현대적 여성상에 맞게 현실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여자로 그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영화계에서 무척 '희귀한' 여성주도형 영화라서 더욱 "귀하고 소중하게" 느꼈다.
여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극이 진행되는 탓에 임수정은 캐릭터에 줄곧 몰입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고, 조금은 외로웠던 그 시간을 캐릭터에 녹여냈다.
돌이켜 보면 임수정은 항상 그랬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연기했다. "좋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야 하고, 좋은 연기로 만족감을 드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었어요. 장르물이건 멜로물이건 현장에선 늘 힘겹더군요. 그런데 지난해 두 작품을 연달아 촬영하면서 마음이 확 열렸어요. 이젠 현장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즐기는 법을 알 것 같아요."
'은밀한 유혹'에서 만난 유연석과 개봉을 앞둔 '시간이탈자'의 조정석은 임수정에게 큰 자극제가 됐다. "유연석은 당시에 '제보자'와 '상의원'까지 동시에 세 작품을 촬영 중이었어요. 드라마로 크게 주목받은 이후였는데도 역할의 크고 작음에 상관 없이 꾸준히 연기하는 모습이 멋있더군요. 조정석도 현장에 임하는 자세가 정말 좋은 배우였고요. 뮤지션은 무대 위에서 가장 멋있는 것처럼, 배우도 현장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것 같아요. 그걸 실천하고 있는 두 배우를 보면서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됐어요. 이젠 저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동안 임수정의 연기 행보는 '전략'이나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마음을 툭 건드리는 작품"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는 2004년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후 뚝 끊겼다. "드라마를 통해 해외로 진출하는 배우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 대해선 제가 무디기도 했고 욕심도 없었죠. 좋은 의미에서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많은 작품에 출연하겠다며 열정으로 달아오른 임수정이 요즘 애정을 쏟고 있는 또 다른 일들이 있다. 바로 꽃꽂이와 기타 연주다. 특히 몇 년 전 시작한 기타 연주는 이제 실력이 쌓여 몇 곡 정도는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가끔 촬영장에 기타를 가져가 틈틈이 연주를 하곤 한다. 임수정은 영화 '비포 선셋'의 엔딩에서 줄리 델피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장면을 떠올리며 "언젠가 근사한 음악영화에서 직접 연주를 해볼 그날을 꿈꿔본다"고 했다.
그리고 좋은 배우란 타이틀 만큼 그가 욕심내는 건 작가 타이틀이다. 전시회, 공연, 영화 등을 본 뒤 리뷰도 쓰고 스치는 아이디어도 기록으로 남긴다. 때론 누군가에 대한 실망감이나 아쉬움을 일기형식으로도 쓴다. "지금은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단계예요. 멀지 않은 시간 안에 결과물을 내보고 싶어요. 나이 들어도 가장 가까이에서 하고 싶은 일은 글 작업이에요. 60대에도 배우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글은 계속 쓰고 있을 거예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