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식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스포츠를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의외성이 사람 마음을 움직일 때가 많다. 기록적인 면만 놓고 보면 금방 잊혀질 수도 있지만,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가 리그를 풍성하게 한다.
올시즌 유난히 가슴 먹먹하게 하는 감동 스토리가 많다. '퇴물'로 몰렸던 투수, '불운'을 달고 달았던 투수가 활짝 웃었고, 13년 만에 처음으로 퀄리티 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따낸 투수가 있다.
NC 다이노스 투수 박명환(38). 한때 KBO 리그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 간판 투수였다. 오랫동안 'FA 먹튀' 오명을 쓰고 있었다. 두산 베어스 에이스 박명환은 2006년 시즌이 끝난 뒤 뒤 LG 트윈스와 4년간 최대 40억원에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했다. 투수 FA 최고액에 계약했는데, 2010년까지 4년간 14승16패, 평균자책점 4.79. 부상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전성기 때 공을 던질 수가 없었다. 2011년 연봉이 5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삭감됐다. 2012년 시즌이 끝난 뒤 LG는 방출을 통보했다.
소속팀 없는 무적신세. 개인훈련을 하며 버텼다. 테스트를 거쳐 어렵게 다이노스 식구가 됐다. 지난해 6월 4일 넥센 히어로즈전에 1425일 만에 등판해 다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지난 17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선발로 나서 6이닝 동안 4사구 없이 2안타 무실점을 기록하고 승리투수가 됐다. 2010년 6월 23일 SK 와이번스전 이후 1789일 만에 통산 103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150km 강속구를 던질 때 제구력 불안을 안고 살았는데, 지난 시간이 박명환을 바꿔 놓았다.
KIA 타이거즈 투수 임준혁(31)은 포수 출신이다. 2003년 동산고를 졸업하고 포수로 타이거즈맨이 됐다. 강한 어깨를 살려보기 위해 투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프로 13년차인 올해 연봉이 5000만원.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시속 150km 강속구도 보기 어렵다. 지난 스프링 캠프부터 선발 후보로 씩씩하게 던졌는데, 운도 따르지 않았다. 시즌 개막 직후에 허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번 달 초에 1군에서 콜이 왔다. 마침내 14일 kt 위즈전에 선발 등판했다. 2009년 5월 6일 히어로즈전 이후 2199일 만의 선발 등판, 통산 6번째 선발 등판이었다. 임준혁은 6이닝 2실점(비자책)하고 2512일 만에 선발승을 따냈다. 2008년 6월 27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선발승을 거둔 후 프로 두번째 선발승이었다. 프로에서 6이닝을 던진 게 이날 처음이었고, 당연히 퀄리티 스타트도 처음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박병환과 마찬가지로 임준혁도 값진 승리가 미래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이제 고비 하나를 넘겼을 뿐이다. 임준혁은 "선발이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선발이든 불펜이든 많은 이닝을 던져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제 제대로된 시작이다.
지난해 시즌 종료를 앞두고 롯데 투수 심수창은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야구가 지독하게 안 됐다. 뭐를 해도 잘 풀리지 않았다. 난타를 당하고 2군에 내려왔을 때, 글러브를 벗을 생각을 했다. 당시 스리쿼터로 투구폼을 다르게 해보라고 조언은 한 게 이종운 코치(현 감독)였다.
심수창은 지난 13일 히어로즈전에서 1⅔ 1안타 1실점을 기록하고 구원승을 거뒀다. 올시즌 선발 투수로 잘 더지고도 불펜 난조로 승리를 눈앞에서 날린 경우가 있었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8회 2점차 리드 상황에서 구워등판해 동점을 허용했고, 9회 끝내기 홈런이 터졌다. 히어로즈 소속이던 2011년 8월 27일 롯데를 상대로 선발승을 거둔 이후 1355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심수창만큼 1승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선수가 있을까. 그는 LG 소속이던 2009년에서 히어로즈 시절인 2011년에 걸쳐 18연패를 당했다. KBO 리그 최다 연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