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자살보험금' 관련해 생명보험회사들이 자신들이 만든 보험약관을 스스로 '허위'라고 주장하며 '소송 만능주의'로 고객들과 맞서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생보사들은 생명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나 가입자가 자살한 경우 약관과는 다르게 재해사망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나 자연재해 등으로 사망할 경우에 지급하는 재해사망금은 일반사망금의 약 2배에 달한다. 이 때문에 '보험상품을 팔고나면 그만'이라는 생보사들의 무책임한 행태에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생보사의 "약관 오기" 오리발에 법원 가입자 손 들어줘
자살은 재해에 속하지 않지만 지난 2001년부터 2010년 4월까지 생보사들이 판매한 보험상품의 약관에는 보험 가입 2년 경과 후 자살을 했을 경우 재해사망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생보사들은 "당시 약관은 단순 오기였을 뿐"이라며 일제히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표기상 실수로 빚어진 해프닝으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법 민사101 단독 박주연 판사는 지난달 25일 보험사 대신 가입자의 손을 들어줬다. 박모씨 등 2명이 삼성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지급소송에서 "특약에 따른 재해사망 보험금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 박씨는 지난 2006년 8월 아들의 이름으로 보험을 들면서 재해 사망시 일반 보험금 외에 1억원을 별도로 주는 특약에 가입했다. 가입 당시 약관에 따르면 자살은 재해사망보험금 지급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특약 보장개시일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자살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단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박씨 아들은 보험 가입 후 9년여가 지난 2014년 3월 자살했으나 삼성생명은 일반보험금 6300만원만 지급했다. 이에 박씨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것이다.
재판부는 "약관에서 정신질환 자살과 보험가입 후 2년이 지난 뒤의 자살을 병렬적으로 기재하고 있기에 두 사안 모두 재해사망보험금 지급대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삼성생명은 "항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살보험금 관련해 생보사들이 모두 법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입장이어서 삼성생명은 항소할 것으로 업계에선 보고 있다. 또 2심에서 패할 경우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박 씨 등은 오랜 시간 소송에 시달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생보사들, '아니면 말고 식' 소송 남발로 '빈축'
보험사들이 가입자를 상대로 소송을 남발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험사가 소송을 제기할 경우 가입자는 대개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법무팀이 탄탄한 대기업과 맞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에 의문을 품게 마련이고, 생업에 바쁜 서민들로선 변호사를 고용해 장기간 이에 맞서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사들은 1심에서 패소할 경우 거의 항소와 상고까지 끌고 가기 때문에 소송에 끝까지 임하기 위해서는 3년 안팎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보험 민원인들은 정당한 사유임에도 보험사가 소송을 하겠다고 할 경우 손해를 보고서라도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기 일쑤라고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전했다. 보험회사 입장에선 소송 전담 법무팀이 있기에 가입자들을 상대로 소송전을 진행하는 것이 일상 업무일 뿐이다. 설사 패소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분석이다.
이번 자살보험금과 관련해 ING생명도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9월 ING생명에게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 등에 대해 기관주의와 함께 4억53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지난 2013년 중반에 이뤄진 금감원의 종합검사 당시 ING생명이 가입 후 2년이 지난 후 자살한 경우 약관에 따라 지급하지 않은 보험금이 총 432억원으로 집계됐다. 금감원은 여기에 지연이자 128억원을 포함해 560억원의 지급방안을 마련하라고 ING생명에 통보했다. 자살보험금 관련한 금감원의 첫 검사결과였다.
하지만 ING생명은 지난해 11월 금감원의 제재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약관 표기상의 실수로 인해 자살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를 기초로 이뤄진 금감원의 제재가 합당한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ING생명과의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승소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지난 2007년 대법원이 피보험자가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 경과 후 자살 시 재해사망특약 약관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기 때문이다.
▶생보사의 또 다른 노림수, '2년 소멸시효'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현재 외국계를 포함한 17개 생보사들이 약관을 어기고 미지급한 자살보험금 총액은 2179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ING생명이 653억원으로 가장 많고 삼성생명 563억원, 교보생명 223억원, 알리안츠생명 150억원, 동부생명 108억원, 신한생명 103억원, 한화생명 73억원, 현대라이프 69억원, KDB생명 68억원, 메트라이프 61억원 등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생보사들이 이심전심으로 소송전을 진행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소멸시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시각이다.
법무법인 대산의 추연식 변호사는 "보험금의 소멸시효는 2년이다. 소송을 오랜 시간 끌고 가면 그동안 자살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한 가입자들 중 상당수가 소멸시효에 걸려 보험사에 어떤 주장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ING생명이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도 대법원까지 갈 경우 3년여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추 변호사는 이번 자살보험금 소송과 관련, "약관규제법 상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보험 전문가들이 만든 약관이 실수였다면 보험회사들이 당연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석했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보험회사들의 마구잡이식 소송을 막기 위해서는 선진국에서처럼 보험민원과 관련해 정부 기구의 중재기능이 법보다 앞설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정비를 할 필요가 있다" 고 밝혔다. 송진현 기자 jhso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