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낀 세대'다.
정성룡(30·수원)보다 두 살 어리고, 김승규(25·울산)보다는 세 살이 많다. A대표팀 주전 골키퍼는 대한민국 골키퍼 가운데 단 한 명만 누릴 수 있다. 특수한 만큼 수문장만의 보수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변화에 둔감하다. '넘버 원'이 지배한다. 한 번 자리를 꿰차면 교체가 쉽지 않다. 최인영→김병지→이운재에 이어 정성룡이 주전 지위를 누렸다. 키를 잡으면 짧게는 3~4년 길게는 7~8년 정상에 선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 깨졌다. 김진현(28·세레소 오사카)의 등장으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주전 골키퍼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거쳐 정성룡에서 김승규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 벨기에전에서 선발 출전한 김승규는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와일드카드로 승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7년 만의 외국인 감독 시대가 도래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데뷔전, 그의 선택은 김진현이었다. 지난해 10월 10일 천안에서 열린 파라과이전이었다. 김진현은 후반 신들린 방어를 펼치며 팀의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강렬한 첫 인상은 2015년 호주아시안컵에서도 현실이 됐다. 김진현은 명실공히 새로운 '안방마님'으로 자리잡았다. 슈퍼세이브의 향연이다. 그는 오만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 선발 출전했다. 후반 46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코너킥 상황에서 상대의 날카로운 헤딩슛을 손을 뻗어 저지했다. 적장도 혀를 내둘렀다. 폴 르갱 오만 감독은 "한국 골키퍼가 경기 막판 엄청난 선방을 했다. 우리에겐 정말 좋은 찬스였는데 불행히도 성공시키지 못했다"며 탄식했다.
쉼표는 있었다. 김진현은 감기몸살로 쿠웨이트와의 2차전에는 결장했다. 17일 열린 호주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존재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실점과 다름없는 3~4차례 결정적인 위기를 육탄방어했다. 전반 16분 호주 번즈의 슈팅을 몸을 날리며 막아냈다. 골대 구석으로 낮게 깔려오는 공을 손끝으로 쳐냈다. 후반 들어 호주의 파상공세는 더 매서웠다. 김진현은 무결점이었다. 후반 24분 번즈는 수비수 2명을 제치고 박스 안까지 침투해 반대편 골대를 향해 오른발 슈팅을 날렸다. 김진현은 역동작에 걸렸지만 동물적인 감각은 압권이었다. 긴팔을 쭉 뻗어 골문을 지켰다. 후반 43분에는 로비 크루스와 1대1로 맞닥뜨렸다. 결국 골망이 흔들릴 것으로 예상된 아찔한 순간, 그는 오른팔로 크루스의 슈팅을 저지했다. 3전 전승, 조 1위를 확정짓는 선방이었다.
슈틸리케호는 조별리그 3경기 모두 1대0으로 승리했다. 조별리그 무실점은 2004년 중국 대회 이후 11년 만이다.
김진현이 빚은 작품이었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변방이었다. 동국대 재학 중이던 2009년 그는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 둥지를 틀었다. 1m93의 체격과 순발력을 갖춘 그는 세레소 오사카에 주전 자리를 잡았다. 태극마크와의 인연도 시작됐다. 2010년 왼무릎 연골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에 성공했다. 4년전 카타르아시안컵 최종엔트리에 승선했다. 그러나 '발탁=출전', 등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정성룡 김승규는 물론 이범영(26·부산)에게도 가렸다. 2012년 5월 최강희호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이었다. 그 벽을 넘지 못했다. 4실점을 하면서 무너졌다. 기회는 그렇게 사라지는 듯 했지만 슈틸리케호에서 만개했다.
김진현의 강점은 뛰어난 반사신경이다. 위치 선정과 제공권 장악 능력도 탁월하다. 순간 집중력 부족으로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단점도 보완했다.
한국 축구 골키퍼 계보가 궤도를 수정했다. 김진현의 시대가 열렸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