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못해서 주연에 발탁된 연기자, 그런데 연기력이 늘어서 제작진을 근심에 빠뜨린 연기자, 10년지기 매니저의 휴대폰에 '로보트'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연기자. 발연기의 독창적 영역을 개척한 젝스키스 장수원, 그가 장그래가 되어 안방극장에 돌아온다.
얼마 전 장수원이 tvN 패러디 드라마 '미생물'의 장그래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국어책 읽듯 단조로운 대사톤과 경직된 표정 연기. '로봇연기의 창시자'라 불리는 그가 아닌가. 2일 첫 방송을 앞두고 새해 첫날 만난 장수원은 "뭐 그렇게 대단한 작품도 아닌데…"라며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화제작 '미생'을 패러디한 '미생물'은 춤과 노래가 인생의 모든 것이던 아이돌 연습생 출신 장그래가 연예계 데뷔에 실패한 뒤 회사라는 냉혹한 현실에 던져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장수원은 "진짜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제가 '미생물' 캐스팅 전까지 '미생'을 못 봤어요. 패러디 드라마니까 예능 형식일 거라고 생각하고 부담없이 시작했죠.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진짜 드라마'더라고요. 6일간 촬영하며 거의 잠을 못 잤어요. 어휴~ 고생 꽤나 했어요."
'미생물'에는 장그래를 비롯해 오차장, 김대리, 장백기, 안영이, 한석율, 최전무 등 주요 캐릭터가 그대로 등장한다. 원작 출연 배우들의 연기톤과 외모 특징까지 똑같이 재현했다. 대사에 약간씩 코믹 요소를 가미했을 뿐, 캐릭터를 우스꽝스럽게 비틀지는 않았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장수원의 모습을 보니 그의 장그래 연기가 어떨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촬영 준비를 하면서 '미생'을 봤는데 장그래가 그렇게 개성 있는 캐릭터는 아니더라고요. 소심하고 말이 없고 움츠러들어 있는 모습이 평소의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죠. 제가 회사에 입사했다면 장그래와 비슷했을 거예요. 처음엔 저도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요. 그래서 '미생물'을 위해 따로 캐릭터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죠. 하지만 실제 연기를 해보니 임시완이 연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하."
장수원은 '연기 투혼'을 불살랐다. 매 순간 장그래 그 자체로 살았다. 그중에서도 정규직을 욕심내지 말라고 조언하는 오차장에게 장그래가 "욕심도 허락받아야 합니까. 그냥 일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 같이 계속"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장수원의 '메소드 연기'에 빠져든 연출자 백승룡 PD가 촬영 후 '당신 연기에 반했다'면서 장수원을 와락 끌어안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청자들이 학수고대하는 그의 로봇연기는 볼 수 없는 걸까. "제 연기가 늘어봤자 얼마나 늘었겠어요. 워낙 기대치가 낮으니까. 아주 조~금 나아진 정도겠죠." 장수원이 '푸흡' 웃음을 터뜨린다.
"90%는 진정성을 갖고 연기했고요 ,10%는 재미를 위해 연기했어요. 하지만 일부러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비춰지게 하는 연기도 꽤 어렵거든요. 10%에도 혼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니 정말 연기력이 늘더라고요. 물론 저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실망했다는 팬들도 있어요. 그래도 굳이 억지스럽게 로봇연기를 보여드리는 것보다, 제 본연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주변에서 발벗고 나서서 말리고 있긴 하지만 장수원은 한번쯤 연기의 기본기를 배워보고 싶다고 한다. '미생물'처럼 현장 분위기가 좋다면 연기를 꾸준히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덤비진 않을 생각이다. "점점 로봇에서 사람이 돼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연기자보다는 연예인을 계속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방송국에서 '미생물' 시청률이 '미생' 시청률을 넘어서면 요르단으로 포상휴가를 보내준다던데, 그게 과연 가능하겠어요? 하하."
그래도 재차 정극연기에 도전하라고 권하니 장수원이 재치있게 답한다. "임시완에겐 시나리오가 50개, 저에겐 CF가 5개예요." 그러고는 한참이나 수줍게 웃더니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저는 지금도 정극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