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뭉칫돈이 대거 이동하고 있다. 은행 예금에서 돈을 인출해 비과세 보험이나 금, 미술품, 현금 등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자산이나 금융상품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오는 29일부터 불법 차명거래가 적발될 경우 명의를 빌린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거나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는 등 금융실명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현재 은행권 정기예금 잔액은 562조원으로 4월말 555조2000억원에서 6조8000억원 가량 늘었다. 저금리 추세로 정기예금 금리가 연 2%대 초반까지 떨어졌으나 뚜렷한 투자처를 찾기 힘들자 정기예금에 몰린 결과다.
하지만 부자들은 전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하나은행의 경우 10억원 이상 돈을 맡긴 고액 예금자의 예금 총액이 지난 4월말 7조6000억원에서 10월말 7조원으로 6000억원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에서도 4월말 4조7000억원에 육박했던 10억원 이상 고액 예금 총액도 10월말 4조2000여억원으로 4000억원 정도 감소했다. 9월과 10월에는 각각 1000억원이 넘는 뭉칫돈이 고액 예금에서 빠져나갔다.
은행권에서의 이 같은 고액 예금 감소는 지난 5월초 국회를 통과한 후 오는 29일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금융실명제 개정안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차명 금융계좌를 사실상 완전히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5년 이하 징역 등 형사 처분까지 받게 하는 강력한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서 차명계좌나 가족 간 분산 계좌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설명이다.
반면 '세테크'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꼽히는 비과세 보험이나 금·은 등의 판매 추이는 정기예금에서의 자금 이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금거래소에 따르면 1㎏당 5000만원 가량인 골드바의 판매는 지난 1월 68㎏에서 지난달 132㎏까지 뛰어올랐다. 특히 4월 59㎏였던 판매량이 5월 94㎏으로 늘어나는 등 금융실명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5월부터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는 양상이다.
또 삼성, 한화, 교보생명 등 3대 생명보험사의 비과세 저축성보험 초회 보험료와 일시납 연금은 8월 2651억원, 9월 2823억원, 10월 3526억원으로 최근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위한 금융실명제의 강화 취지가 퇴색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송진현 기자 jhso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