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는 습관은 내 힘의 원천이다."
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이하윤의 수필 '메모광'을 기억할 것이다. 시인이요 영문학자이자 기자였던 작가는 작품에서 '메모는 내 물심양면의 전진하는 발자취이며, 소멸해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요, 인생 생활의 축도'라며 메모를 예찬했다.
SK 와이번스 김용희 감독은 야구계의 '메모광'으로 통한다. 부산 동광초 4학년때부터 일기를 쓰고 메모하는 습관을 지녔다고 하니 50년 가까운 세월을 메모에 의존해 살아온 셈이다. 지난달 SK 사령탑 취임식에서 김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가며 답변을 이어나갔다.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서 그랬다"고 했는데, 평소의 습관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현역 시절 뿐만 아니라 지도자와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야구에 관한 생각들 뿐이었으며, 뭔가가 뇌리를 스치면 메모지를 꺼내들곤 했다. 덕분에 그의 집 방 한 칸은 일기장과 메모장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사할 때 일부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강조한다.
김 감독은 자신의 메모 습관을 코치들이나 선수들에게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신이 생각하는 야구관과 철학을 메모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한다. SK는 현재 일본 가고시마에서 마무리 훈련에 한창이다. 지난달 26일 시작한 마무리 캠프는 오는 30일까지 36일간의 일정이다.
김 감독은 훈련장인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 종합운동공원에 나갈 때 늘 바지 뒷주머니에 메모장을 챙긴다.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며 수시로 메모한다. 깨알처럼 적은 메모 내용을 정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과중 하나다. 코치들에게 내릴 지시사항, 선수들의 훈련을 보고 느낀 보완점,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것들 등 그 내용은 다양하고 방대하다.
김 감독은 "현장에서 바로 지시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라면 굳이 감독이 나설 필요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내가 바라는 야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코치들이나 선수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가 있는데, 이때 선수에게 두 번의 지시가 내려져 혼란을 가중시킬 경우도 생긴다. 나와 코치들 사이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고, 메모는 그때 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낮에 메모한 것을 그날 밤 코치들과 논의한 뒤 최종 사항을 선수들에게 지시한다. 메모의 힘이 발휘되는 것은 이 시간이다.
김 감독은 최근 선수단 미팅 자리에서 당부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맹자'에 나오는 문구인 '종신지우(終身之憂)를 소개하며 "야구는 내 인생의 종신지우다. 평생의 근심거리라는 뜻이다. 여러분들에게도 야구가 종신지우가 되어야 한다"면서 "점점 야구를 알아가면서 내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 역시 야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은 스타가 아니라 슈퍼스타가 되어야 한다. 슈퍼스타는 기술, 재능은 물론 인성까지 갖추어야만이 가능하다. 그럴 때만이 팬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구가 자신의 종신지우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김 감독은 메모지를 꺼내들고 '찾아서 해라', '생각해서 해라', '진심을 다해서 해라' 라는 세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고 한다.
14년만에 사령탑에 복귀한 김 감독이 메모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