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한국시각) 이란 테헤란에 위치한 에스테그랄 호텔. 슈틸리케호가 중동 원정 두 번째 경기를 치르기 위해 여장을 풀었다. 짐 정리를 마친 태극전사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쳤을 때 즈음 깜짝 이벤트가 펼쳐졌다. 갑자기 식당의 불이 꺼졌다. 주방에서 한 줄기의 불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케이크가 등장했다. 60번째 생일을 맞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60)을 위해 선수들이 준비한 이벤트였다. 선수들은 한국어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대표팀 관계자에 따르면, 놀란 표정을 짓던 슈틸리케 감독은 케이크에 '60' 모양의 초를 보고 그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여러분이 나에게 준 고마운 선물은 요르단전 승리였다"고 말하며 힘차게 촛불을 불어 껐다.
슈틸리케 감독의 말대로, 승리만큼 값진 생일 선물은 없었다. 한국은 14일 요르단 암만의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요르단과의 평가전에서 1대0으로 신승했다. 명품 K-리거들이 슈틸리케의 선물을 제작했다. K-리거의 품격을 입증한 주인공은 차두리(34·서울)와 한교원(24·전북)이었다. 차두리의 클래스는 특별했다. 생애 세 번째 주장 완장을 찼다. 그가 소화한 전반 45분은 완벽했다. 현역과 은퇴의 갈림길에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차두리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오버래핑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자로 잰듯한 로빙 패스도 압권이었다.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공격수들에게 쉴새없이 패스를 연결했다. 단 한 차례도 오차가 없었다. '택배 크로스'는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냈다. 전반 35분 그의 발을 떠난 볼은 그대로 한교원의 머리에 꽂혔다. 골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또 다른 실험을 위해 후반 시작과 동시에 차두리를 김창수(가시와)로 교체했다. 그러나 전성기를 방불케 한 차두리의 45분은 슈틸리케 감독의 희망이었다.
한교원은 자신의 가치를 골로 어필했다. A매치 데뷔골이었다. 9월 5일 베네수엘라전에서 A매치에 데뷔한 이후 4경기 출전 만에 데뷔골을 신고했다. 일당백이었다. 태극마크를 달지 못한 K-리거들의 자존심이었다. 이번 중동 원정에 나선 슈틸리케호 2기 엔트리 22명 중 K-리거는 고작 4명이었다.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 정성룡(수원)과 김승규(울산)를 빼면 필드 플레이어는 차두리(FC서울)와 한교원(전북), 단 둘 뿐이었다. 한국 축구의 텃밭인 K-리그에서 이룬 '폭풍 성장'이 A대표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올시즌 인천에서 전북으로 이적한 한교원은 31경기에 출전, 10골-3도움으로 생애 첫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측면 돌파가 장기다. 발도 빠르지만 슈팅도 반박자 빠르다. 전반기에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최강희 전북 감독의 조련 속에 후반기에 기량이 만개했다. 전북의 K-리그 조기 우승을 견인한 핵심 멤버다.
잠재력이 슈틸리케호에서도 폭발했다. 한교원의 슈틸리케 감독이 원하는 전술적 움직임을 잘 소화했다. 조영철 박주영 김민우 등 2선 공격수들과 함께 활발한 포지션 체인지를 펼쳐 상대 수비진을 교란시켰다. 한교원의 맹활약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측 측면 공격수의 주전 경쟁에 불을 지폈다. 그 동안 오른쪽 측면은 이청용(볼턴)의 세상이었다. 붙박이었다. 그러나 한교원이라는 새 얼굴이 등장하면서 이청용도 주전을 쉽게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 구성을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차두리와 한교원의 활약으로 대표팀 내 K-리거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K-리거들의 경쟁력은 이미 브라질월드컵에서 잘 나타났다. 이근호(상주) 김신욱(울산) 김승규 등 K-리거들이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 이상 K-리거들은 A대표팀 내 백업이 아니다.
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