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선수였다.
2011년 번외 지명으로 FC서울에 둥지를 튼 그가 내세울 건 신체조건 뿐이었다. 1m94, 84kg. 설상가상 버티고 있는 벽은 더 높았다. 베테랑인 김용대(35)였다. 골키퍼 자리는 웬만해선 주전 자리가 바뀌지 않는다. 서울의 안방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유상훈(25)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유상훈은 27일 방점을 찍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8강 2차전 승부차기에서 포항 키커의 슛을 모두 막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팀의 4강행을 이끌었다. 포항의 1~3번 키커로 나선 황지수 김재성 박희철의 슛을 모두 막아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달 5일 전남전에서 김용대가 쓰러졌다. 김용대는 브라질월드컵 후 재개된 첫 경기에서 골대에 부딪혀 교체됐다. 유상훈이 등장했다. 누수는 없었다. 지난달 16일 FA컵 16강전에서도 포항과 승부차기를 경험했다. 그 때도 4-2로 승리하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FA컵 16강전의 MVP로 선정됐다.
ACL 2차전은 유상훈을 위한 무대였다. 승부차기는 과학적으로 키커에게 훨씬 유리하다. 흔히들 성공가능성 100%라고들 말한다. 골문까지 볼의 도달 시간은 대략 0.55초다. 골키퍼의 반응시간은 0.66초로 이보다 늦다. 방향만 정확하다면 골키퍼가 막아낼 재간이 없다. 기술과 과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정신력 싸움이다.
유상훈은 이날 미소를 머금으며 골문에 섰다. 키커들을 향해 농락하는 표정과 손짓으로 기선을 제압했고, 100% 선방쇼를 펼쳤다. 유상훈은 2011년 정규리그 1경기, 2013년 3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올시즌 벌써 8경기에 출전했다. 김용대가 복귀했지만 유상훈은 ACL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골키퍼도 로테이션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다. 김용대는 23일 전북과의 원정경기(2대1 승)에서 골문을 지켰다. 최용수 서울 감독은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경기 전 용대를 내 방에 불러 '고민한 결과 마지막(승부차기)엔 (유)상훈이가 역할을 해줄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용대가 잘 받아들여줬다. 용대가 있었기에 상훈이가 클 수 있었다"며 웃었다.
이날 경기의 최우수선수(MOM)는 유상훈의 차지였다. "경기 직전 미팅 때까지 선발로 나설 지 몰랐다. ACL이라는 큰 대회에서 4강에 올라 기쁘다. 120분 간 무실점으로 막아준 동료들에게 고맙다. 포항 키커들이 승부차기에 들어서면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1번 키커와 2번 키커 슛을 모두 막아내면서 자신감이 생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활짝 웃었다. 그리고 "한 달 전 FA컵에서 (포항 선수들의 슛을) 막아본 경험이 오늘 잘 발휘된 것 같다"며 "박희철의 경우 데이터에 없었지만, 앞선 두 명의 슛을 막아내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감도 잘 들어 맞았다"며 기뻐했다.
한국 축구에 새로운 미래가 탄생했다. 서울의 안방도 후끈 달아올랐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