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멀티플레이어' 유지노(25)가 돌아왔다.
유지노는 10-13일 서울과의 2연전에 연속 선발로 나섰다. 10일 서울과의 K-리그 클래식 20라운드에선 스리백 체제에서 오른쪽 윙어로 나섰다. 13일 서울과의 FA컵 8강전에선 포백 체제에서 오른쪽 측면수비수로 섰다. 2경기에서 2연패했지만, '멀티플레이어 유지노의 재발견'은 서울전이 남긴 수확이었다.
전남 유스 출신 유지노는 공격하는 수비수, 수비하는 공격수다. 광양제철고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박항서, 정해성 감독이 이끌던 전남에선 오른쪽 , 왼쪽을 오가는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멀티플레이어다. 오른쪽 붙박이 수비수 박준강이 부상하며, 부산은 위기를 맞았다. 윤성효 부산 감독이 포백을 스리백으로 바꾸는 변화를 시도할 만큼 빈자리는 컸다. 윤 감독은 위기의 순간 유지노를 떠올렸다. 서울과의 2연전에 유지노를 선발로 내세웠다. 유지노는 필사적인 플레이로 기대에 부응했다.
프로 7년차 스물다섯살 유지노에게 지난 1년은 인생 최악의 시련이었다. 연령별 대표팀, 올림픽대표팀을 오가던 엘리트 선수다. 2008년 전남에서 데뷔한 후 5시즌간 72경기에 출전했다. 2013년 성남 이적 직후 선수생명이 기로에 섰다. "운동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하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축구에 대한, 재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었다. 가장 힘든 순간, 부산이 러브콜을 보냈다. "부산이 나를 두고 고민해야 할 상황에 내가 오히려 더 고민했다. 운동을 그만두고 싶었다."
한번 뜬 마음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흔들리는 유지노를 붙잡은 건 '가족'이었다. "여태껏 잘해왔는데 이렇게 그만둬서는 안된다. 1년이든, 2년이든 자랑스럽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할 만큼 해본 후,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 가족들의 호소에 유지노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나 역시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인생을 걸었던 축구가 싫어지는 아픈 경험을 한 후 유지노는 성숙해졌다. '내려놓는 법'도 배웠다. "올해도 손목 부상이 있었고, 많이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더라. 경기를 많이 뛰지 못했지만 감독님을 원망한 적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경기를 뛰든 안뛰든 항상 열심히 준비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윤 감독은 가장 중요한 서울과의 2연전에 '준비된' 유지노를 중용했다. 올시즌 처음으로 그라운드에 나섰다. "손목 뼈가 완전하지 않고 훈련장에 복귀한지 일주일도 안된 상태에서 감독님이 서울전을 말씀하셨다. 감독님이 믿어주셨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되든 안되든 오늘 죽을 각오로 뛰자, 그 생각뿐이었다.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었다"고 했다. 유지노의 절실함은 그라운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날 유지노는 결정적인 2번의 골찬스를 만들어냈다. 전반, 문전으로 거침없이 쇄도하며 수비수를 제치고 쏘아올린 슈팅은 골대를 맞았다. 후반전에도 대포알 슈팅으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유지노는 "두번 모두 골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에서 80경기를 뛰면서 이렇게 좋은 찬스를 맞은 건 처음이었는데…"라며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이날 부산은 0대2로 패했지만 '돌아온 유지노'의 투혼은 이슈가 됐다. "내가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다. 팀이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고개 숙였다. "앞으로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늘 그래왔듯이 최선을 다하겠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유지노는 부산의 강등권 탈출을 자신했다. 2012년 전남에서 피말리는 강등권 전쟁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을 2년전에도 전남에서 겪어봤다. 그래도 그때 전남보다 지금 부산이 더 강팀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전남은 선수들끼리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좋은 팀으로 인정받고 있다. 모든 팀에 시련은 한번씩 찾아온다. 우리는 멤버도 좋고, 경기내용도 나쁘지 않다. 이 시련을 이겨내면 내년, 내후년에는 틀림없이 더 좋은 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소년을 키우는 건 8할이 바람이다. 지난 1년, 지독한 시련을 이겨낸 유지노 역시 안팎으로 더 단단해졌다. "어린 나이에 많은 연봉을 받고 외제차도 타봤다. 지금은 연봉이 반 이상 깎였다. 차도 없다. 프로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지만, 어릴 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다. 지금이 더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다. 이 경험이 긴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더 늦었다면 못일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젊었을 때 힘든 일을 겪은 것에도 감사한다"고 했다. 프로선수로서의 꿈을 물었다. 단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프로 7년차지만 아직 스물다섯살이다. 앞으로 운동해야 할 날이 더 많다. 내가 이정도 했으니, 이정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이 정도밖에 안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이 목표다. 그러다 보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꿈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원동 부산 사장은 서울전을 앞두고 유지노에게 '사석위호(射石爲虎)'라는 사자성어를 일러줬다고 귀띔했다. 유지노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뜸 휴대폰을 꺼내든다. "호랑이를 쏠마음으로 활을 쐈더니 돌에도 화살이 박히더라. 정신을 다해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라며 뜻을 줄줄 읊었다. "지금 상황에서 꼭 기억해야할 좋은 말씀이라서 말씀중에 외워뒀다가, 곧바로 휴대폰에 저장했다. 사장님께서 다음에 다시 물어보실 수도 있으니까"라며 웃었다. 감독의 말도, 사장의 말도, 주의깊게 듣고 사려깊게 기억했다. '준비된 선수'였다. 부산=전영지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