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희망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떠났던 대표팀이 실망을 드려 죄송하다. 질책은 달게 받겠다.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겠다."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이례적이었다. 1998년 '프랑스 쇼크' 당시 축구협회 수뇌부가 성적부진으로 차범근 전 감독을 경질하면서 고개를 숙인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지난 세 차례 월드컵에서는 축구협회가 이런 '대국민 사과'격의 후속 조치를 할 필요가 없었다. 4강 신화를 달성한 2002년 한-일월드컵과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일군 2010년 남아공 대회에선 결과가 좋았다. 2006년 독일 대회 때는 과정이 좋았다. 조별리그에서 짐을 쌌지만, 경기력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은 달랐다. 과정과 결과가 모두 기대를 밑돌았다. 그러자 여론이 등을 돌렸다. 홍명보 A대표팀 감독의 거취가 흔들렸다. 이에 축구협회는 발빠른 사과로 팬심을 회복하고, 홍 감독을 논란의 상자 속에서 꺼내야 했다.
허 부회장은 3일 기자회견에서 홍 감독의 거취에 대한 축구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전했다. "이 상황에서 홍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 협회는 홍 감독을 계속 신뢰하고 지지하기로 했다." 이어 "벨기에전 이후 홍 감독은 황보관 기술위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귀국 후 정몽규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재차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정 회장께서 홍 감독의 사퇴를 만류했다. 월드컵이란 큰 대회를 준비하면서 협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홍 감독의 사퇴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번 실패를 거울삼아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을 잘 이끌어달라고 홍 감독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협회의 홍 감독 유임 결정 배경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악습을 끊고자 했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에서 성적이 좋지 못하면 감독이 모든 것을 떠안고 물러나는 모습을 지우려는 것이다. 허 부회장은 "지금까지 그래왔지 않냐. 월드컵이 끝나면 감독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그만두고 그랬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설명했다.
둘째, 홍 감독이 한국축구사에 남긴 업적이다. 프로팀 사령탑을 맡지 않은 홍 감독의 A대표팀 지도 경험 부족이 도마 위에 올랐지만, 청소년월드컵 8강과 올림픽 동메달 신화는 무시할 수 없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허 부회장은 "한국축구 역사상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감독은 없었다. 나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나는 프로팀 등 여러 경험을 했지만 올림픽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며 "홍 감독이 비록 월드컵에서 실패를 했다지만 '져본 사람이 승리할 줄도 안다'고 했다. 월드컵 실패를 귀중한 경험으로 삼으면 대한민국 축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짧은 월드컵 준비기간이다. 홍 감독에게 지난 1년은 밀실행정으로 경질된 조광래 전 감독과 사상 최초 '시한부' 꼬리표가 붙은 최강희 감독의 과거를 지우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허 감독은 "나도 부담스럽기도 했고, 어려움도 많았다. 홍 감독도 준비하는 기간이 짧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브라질에서 드러난 실패는 홍 감독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허 부회장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미흡했다. 지원 분야, 스태프 등 대두되는 부분이 흡족하지 않았다. 또 경기력에 대해선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했다.
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