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전 네덜란드-멕시코. 도스 산토스의 골에 끌려가던 오렌지 군단을 보며 '필살기'를 너무 일찍 쓴 게 아닌가 싶었다. 스페인에 골 폭탄 투하하며 '티키타카의 종말'을 선언한 이들은 예선 세 경기에서만 무려 10골을 퍼부었다. 예선 3승 뒤 16강에서 허무하게 낙마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일. 반할 감독의 마법도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그 순간 스네이더의 대포알이 오초아가 버틴 벽에 구멍을 냈고, 훈텔라르의 PK가 다시 통과했다. 불과 6분 만에 벌어진 대역전극, 네덜란드는 멕시코를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 내려앉은 쓰리백, 한 방이 안 터질 땐?
같은 듯 다른 옷이었다. 두 팀 모두 쓰리백에 투톱을 들고 나왔지만, 3-5-2 시스템 속 미드필더의 형태는 플레이 스타일을 확연히 바꿔놓는다. 네덜란드가 스네이더를 올려보낸 3-4-1-2였다면, 멕시코는 살시도를 밑에 바친 3-1-4-2였다. 정삼각형이냐, 역삼각형이냐에 따라 무게 중심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네덜란드는 수비진 앞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지지대로 삼고, 앞선 공격형 미드필더의 플레이메이킹에 승부를 거는 식이었다.
이들이 구사한 쓰리백 형태가 공격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최후방에 둔 세 명의 수비는 보통 공격으로 전환하거나, 혹은 상대의 전방 압박이 약할 시 포어리베로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쓸데없이 수비 숫자를 많이 두기보다는 슬그머니 앞선으로 올라와 빌드업에 동참하는 것.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종종 중거리 슈팅을 날린 홍명보가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그대로 뒷문을 지키는 시간대가 많았고, 양 윙백까지 내려 앉아 5백처럼 변했다. 스네이더는 중앙선 언저리로 내려와 쉽게 볼을 받으려고 했는데, 그만큼 반페르시-로벤 투톱과의 간격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는 부지런히 밀고 나왔다. 등을 진 상태로 밀려난 스네이더는 퍼스트터치를 상대 골문 방향으로 돌려놓기 어려웠다. 이는 곧 다음 장면을 이어가기 전 최소 한두 번의 터치가 더 나오고, 볼 처리 템포 역시 늦어진다는 얘기. 투톱을 배치해 고립된 확률은 줄였지만, 로벤 한 명에 멕시코 수비 두세 명이 붙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중앙 미드필더 바이날둠이 종종 올라와 공격 숫자를 늘렸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페널티박스로 들어간 대부분의 볼이 롱패스로 나온 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스네이더를 중심으로 한 라인의 높이가 8강전 성패를 좌우할 터다. 지나치게 처진다면 공격수의 개인 능력에 기댈, 도박성 짙은 경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
▶ 데용 이탈, 중원에 생길 싱크홀은 어떻게?
중원 싸움에서 더 힘들어 진 데엔 데용의 이탈이 크게 작용했다. 전반 8분 만에 마르틴스 인디와 교체되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보통 충격 요법으로 몸 상태가 완성되지 않은 선수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월드컵처럼 결과로써 검증받는 무대에서는 대회를 망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네덜란드 축구협회는 트위터를 통해 데용이 사타구니 부상으로 2∼4주간 경기를 뛸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반할 감독은 전체적인 그림을 바꾸기보다는 마르틴스 인디를 쓰리백의 왼쪽에 배치하고, 블린트를 올려 베이날둠과 중원에서 짝을 맞추게 했다.
문제는 심각했다. 블린트는 지난 시즌 아약스 소속으로 뛴 41경기 중 20경기를 이 위치에서 뛰며 익숙할 법 했으나, 안정감을 기하는 데에는 한참 부족했다. 네덜란드의 쓰리백은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빈번했고, 수비 분담이 안 돼 앞공간을 처리하는 데 미숙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따로 둔 시스템도 아닌 상황, 블린트-베이날둠이 이 공간을 채워주지도 못했다. 슈팅 동작에서 상대 를 빠르게 둘러싸지 못한 건 도스 산토스에게 내준 실점 장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데용이 빠지며 흡입력 좋은 청소기 하나가 사라진 셈. 중원에 생길 거대한 싱크홀에 공-수 양면의 안정감 모두 떨어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 적응 어려운 현지 기후, 해법은 반할 마법?
기후에 따른 체력적 요인은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칠 터다. 역습을 막는 상황, 상대 슈팅에 반응하며 몸 날리는 속도는 멕시코가 월등히 빨랐다. 빠르게 둘러싸며 슈팅 각도를 죽여 골키퍼 오초아에게 할당된 수비 범위 역시 크게 줄었다. 단순히 객관적인 전력만이 아닌,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도 차이를 만들 체력적 변수가 결국엔 승패까지 가른다는 얘기다. 강호로 꼽힌 유럽국이 줄줄이 나가 떨어진 대신, 남미 대륙의 팀들이 상당 수 건재한 것을 보면(광활한 남미 속에서도 열대, 사막, 고산 등 기후의 차이는 존재한다) 브라질 현지의 적응이 얼마나 힘든지 추측해볼 수 있다.
육체적으로 처진 팀을 살려낸 건 반할 감독이 꺼낸 카드였다. 멕시코가 너무 이른 시각부터 공격 숫자를 줄여가며 내려앉자, 네덜란드는 데파이를 넣으며, 끊임없이 전형을 바꿔나갔다. 이 선수가 조금 더 윗선에서 뛰며 볼이 앞으로 투입된 횟수 및 공격 기회도 한결 늘었다. 이렇게 밀어붙이던 와중에 스네이더와 훈텔라르의 한 방이 나온 것이다. 골을 안 먹으면서 한 방씩 해줄 수 있는 에이스를 보유한 팀, 여기에 감독의 임기응변 전략으로 데코레이션까지 가미하는 방식이 토너먼트에서의 생존엔 제격일 수 있다. 다만 헐거워진 중원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버텨질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 코스타리카전에서도 주의깊게 지켜볼 부분이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