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 배우들은 친근하다. 하지만 딜레마도 있다. 이미지 소비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아역 배우가 성인 톱스타로 우뚝 서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성장과정이 모든 사람들에게 원치 않게 공개된다. 그만큼 평범한 성장 과정과는 다른 궤적을 그릴 수 있는 변수가 많다.
그런 면에서 아역 배우들이 본받아야 할 좋은 사례가 있다. 연기 생활 25년차, 중견 배우 못지않은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여배우 김민정이다. 언제까지나 발랄하고 명랑할 것만 같던 그가 언젠가부터 우울함과 슬픔까지 품을 수 있는 내공있는 여배우로 거듭났다.
tvN 드라마 '갑동이'에서는 그동안 갈고 닦은 연기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직도 앳된 아역 시절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는 선함과 독함을 오가는 이중적 캐릭터 오마리아의 연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냈다. 익숨함을 '성장' 과정에 돋아난 새살로 메워 새롭게 거듭난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갑동이'에 대해 후회가 남지 않더라. 최고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리아로 할 수 있는 연기는 다 했다. 작품이 끝나고, '하나 잘 끝냈다'란 후련한 생각이 들더라."
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피해자이기에 오마리아가 가진 트라우마는 크다. 이성과 감성, 논리와 비논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이중적 인물, 그래서 감정신이 힘들었다.
"마리아는 워낙 억눌린 상태에서 연기를 해야한다. 내가 갑동이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기에 꾹 참아야 한다. 그런 억눌림에 대한 해방의 욕구가 일상에서 터져나오더라. 일례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담당하는 분에게 자꾸 헤어스타일을 바꿀까 말까하고 이야기를 했다. '머리를 자를까. 파마를 할까.'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계속 했다. 또 다른 무언가에 분출하고 싶어지더라."
드라마가 끝난 이제는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오랫동안 마음 먹어온 문신을 해보겠단다. 하지만 영원히 남는 타투가 아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헤나를 하겠단다.
"오랫동안 그랬다. 머리를 자르고 싶어도 다음 작품에서 머리가 긴 역할이 들어오면 어쩌나. 염색을 하고 싶어도 사극이 들어오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 말이다. 아역부터 연기자 생활을 오래 해오면서 생긴 지나친 걱정? 습관? 하하. 그런가보다 습관 아닌 습관이다."
늘 그래왔다. 김민정에게 연기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생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누볐던 촬영장은 편한 공간이다. 스태프들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10대가 지나고, 20대도 아쉽게 흘러버렸다.
김민정을 처음 본 건 꽤 오래 전이다. 2005년 드라마 '패션 70's' 당시. 그는 짧은 커트 머리에 너무도 조각 인형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어딘지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드라마 속 역할의 영향이었을까. 너무 예쁜데 어딘가 서늘한 인형같았다. 10여년 전에 대한 기자의 회상에 김민정은 "그때는 그랬을 수도 있다. 20대 때로 다시 돌아가도 난 그랬을 거다. 별로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20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움도 크다. 왜 그렇지 않겠나. 20대란 나이는 어지간한 시행착오도 용서가 되는 나이 아닌가. 그때 모든걸 다 해봤어야 했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그때 내 정신 세계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 또래보다 성숙한데, 주윗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 생활을 늦게 시작한 언니, 오빠들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간극이 컸다. 그때는 좀 외롭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래도 가족이 옆에 있어서 힘이 됐다. 누군가 떠나가도 가족은 늘 옆에 머물지 않나. 미우나 고우나 항상 내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 그게 가족이었나보다. 상투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쁜 일상 속에 늘 뒤를 돌아보면 가족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할 시기. 김민정의 계획이 궁금했다. "나도 만들고 싶다. 항상 어려서부터 서른다섯살을 넘기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어느덧 그 나이를 향해 가고 있다. 단순하게 예쁜 나이에 웨딩드레스도 입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 그렇다고 조바심이 나진 않는다."
여배우들은 마흔이 넘어도 잘 늙지도 않는다는 말에 그는 "그게 여배우의 특권일수도 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하려면 사실 알게모르게 관리를 해야하지 않나"라며 얼마 전 한 행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꺼내놓았다.
"내가 생각하는 롤모델인 김희애 선배님을 며칠 전에 만났다. 천주교 모임에 오셨는데, 안성기 선배님, 김희애 선배님, 김하늘 언니하고 저하고, 교황님 오시는 것을 축하하기위해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자리였다. 사실 연기 생활을 하면서 김희애 선배님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날 처음 인사드렸는데,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그런데 연기적인 커리어나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이 가공적이지 않고, 우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아, 나도 저렇게 우아하게 늙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작품을 끝낸 시점. 차기작을 고르기 전 숨고르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산으로 갈 생각이다. 대부분 연예인들이 작품이 끝나고 해외에 가는 경우가 많더라. 국내에서 마음 편하게 이목을 피하면서 쉬기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해외로 가는 것은 왠지 도피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내 일을 하는 곳에서 쉴 수는 없을까. 사실 산을 좋아한다. 산을 다니기 시작하고, 활력도 생기고, 마음 가짐도 달라지더라. 쌓아뒀던 고민이나 스트레스도 풀리고, 한국에 정말 좋은 산들이 많더라."
추천지를 물었다. 그는 "오대산도 너무 좋았고, 소백산도 너무 좋았는데, 이건 말 그대로 개인 취향이지 않나? 산을 좋아하니까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많은 분들이 국내 산을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을 좋아한다는 김민정을 보면서 위로 높은 곳에 오를수록 세상이 넓게 보인다는 이치가 문득 떠올랐다. 아역부터 이어온 오랜 연기자 생활. 그녀의 성장 과정에는 단지 높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넓음도 있었나보다.
김겨울기자 winte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