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은 생물이다.
유행하는 전술이 있으면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이 태어난다. 영원히 지배하는 전술은 없다. 세월에 따라 유행은 변한다. 이번 브라질월드컵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렸다. 조별리그를 통해 본 새로운 전술을 조명해봤다.
▶티키타카의 몰락?
브라질월드컵 최대 이변은 스페인의 조별리그 탈락이었다. 스페인은 유로2008부터 2010년 남아공월드컵, 유로2012까지 사상 유례없는 메이저대회 3연패를 달성한 당대 최강국이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라는 평까지 들었다.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주전들의 노쇠화 등 불안요소가 있었지만, 그래도 우승후보 이름에서 스페인을 제외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스페인 축구의 근간인 '티키타카(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으로 축구에서 짧은 패싱게임을 의미)'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은 네덜란드(1대5 패), 칠레(0대2 패)에 연패를 당하며 단 두 경기만에 브라질월드컵을 마감했다. 스페인의 축구는 변함이 없었다. 짧은 패스를 중심으로 점유율을 높였다. 네덜란드전 점유율은 57%였고, 패스성공률도 83%에 달했다. 칠레전 역시 56%의 점유율과 82%의 패스성공률을 보였다. 숫자는 허상이었다.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지 못했다. 사비, 이니에스타, 실바 등 위험지역에서 공격을 만들어가는 선수들의 패스성공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스페인의 패스는 위험지역이 아닌 곳을 맴돌았다는 얘기다. 스페인을 상대하는 팀들은 전방압박 보다는 후방에 진을 친 채 상대 공격진을 가두는 플레이를 펼쳤다. 수비숫자를 늘릴 수 있는 스리백이 각광을 받은 이유다.
그러나 스페인의 부진을 티키타카의 몰락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멕시코, 칠레, 콜롬비아 등 짧은 패스를 바탕으로 컴팩트한 축구를 펼친 팀들이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들과 스페인 축구에는 한가지 차이가 있었다. 스페인이 티키타카에 '의존'했다면 멕시코, 칠레, 콜롬비아는 티키타카에 'α'를 더했다.
▶뻥축구로의 회귀?
'α'는 바로 롱패스를 앞세운 빠른 역습이었다. 브라질월드컵 전술의 또 다른 특징은 롱패스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경기당 20%가 넘는 롱패스 구사율을 보이고 있다. 롱패스는 가장 빨리 상대 문전으로 도달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베컴처럼 정확한 킥력을 자랑하는 선수가 아니면 성공 확률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의미하게 전방을 향하는 롱패스는 '뻥축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롱패스는 상대의 뒷공간을 노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변했다. 역습의 속도를 올렸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칠레, 콜롬비아 등의 경기 장면을 살펴보면 압박으로 볼을 뺏어낸 뒤 지체없이 수비 뒷공간을 향해 볼을 넘겼다. 네덜란드는 롱패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킥능력이 뛰어난 미드필더들을 아예 좌우 윙백으로 기용했다. 중앙 미드필더 역시 패스 거리가 긴 선수들이 각광을 받았다. 뒷공간으로 넘어간 볼을 해결하는 것은 2선 공격수의 몫이다.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수들을 유인하면 그 뒷공간을 2선 공격수들이 적극 공략한다. 개인기 만큼이나 스피드가 특출난 선수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네덜란드의 로번, 판 페르시, 콜롬비아의 로드리게스, 콰드라도, 칠레의 산체스, 바르가스, 스위스의 샤키리 등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꼽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롱패스 활용도의 극대화는 '뻥축구로의 회귀'가 아니라 빠른 역습을 위한 선택인 것이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