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가는 아들의 뒷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남자. 투박하지만 속 시원한 돌직구를 첫 축구중계 해설에서 던지는 남자. 12년 전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골든골의 주인공 테리우스 안정환의 현재 모습이다. 2002년 6월 18일 밤 대한민국은 이탈리아를 무너뜨린 안정환의 골든골에 모두 울었다.
1997년 아주대학교 4학년이던 안정환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해 준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추계대학축구연맹전이 열리고 있었다. 안정환이 귀국하던 날 동대문 운동장에서 홍익대와 아주대의 결승전이 열렸다. 아주대가 1-2로 뒤지고 있던 후반 김포공항에서 급히 달려온 안정환이 출전하는 깜짝쇼가 펼쳐졌다. 여독도 풀지 못한 안정환은 2골 1도움을 기록, 아주대는 5대2 역전승으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만화같은 활약을 펼친 안정환은 이듬해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다.
이동국, 고종수와 함께 K리그의 중흥을 이끈 안정환은 1999년 준우승팀 최초로 K리그 MVP에 선정됐다. 안정환은 34경기에서 21골 7 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를 평정했다. 안정환의 활약에 힘입어 그해 부산 대우는 50만에 육박하는 관중을 불러모았다. K리그 최고의 스타가 된 안정환은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2000년 여름 안정환은 이탈리아 세리에 A 페루자에 진출했다.
2000년 12월 한국 축구는 히딩크를 영입했다. 선수 길들이기의 귀재였던 히딩크는 고참 홍명보의 주장 완장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안정환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수비 가담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며 안정환을 채찍질했다. 월드컵 직전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안정환은 두 골을 넣으며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위한 예열을 마쳤다.
2002년 6월 10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D조 조별예선 2차전 미국과의 경기. 0-1로 패색이 짙어가던 후반 33분 교체멤버로 투입된 안정환이 이을용의 롱패스를 헤딩골로 연결시키며 승부를 1대1 무승부로 이끌었다. 이날 더 화제를 모은 것은 안정환과 태극 전사들이 연출한 오노 세리머니다. 그해 2월 솔트레이크시티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m 결승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뺏긴 김동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계획한 세리머니였다.
조별예선 전적 2승 1무. 16강에 조 1위로 진출한 한국은 난적 이탈리아와 만났다. 축구팬들은 차라리 조 2위로 올라가 멕시코와 붙기를 바랬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강했다. 전반 5분 한국이 페널티킥을 얻었다. 하지만 왠지 불길했다. 안정환이 키커로 나섰지만 이탈리아 골키퍼 부폰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전반 9분 수비수 김태영이 복서출신 스트라이커 비에리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가 골절됐다. 결국 전반 19분 비에리가 토티의 코너킥을 받아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이탈리아가 1-0으로 앞서나갔고 경기는 그렇게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런데 후반 42분 기적이 일어났다.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은 것. 더 믿기 힘든 장면이 연장 후반 13분에 벌어졌다. 이영표의 크로스를 안정환이 헤딩슛 골든골로 연결시킨 것이다. 패널티킥 실패로 경기 내내 울었던 안정환은 골든골에 더 크게 울었다.
안정환은 그라운드에 한참 동안 누워있었다. 지옥이 천당으로 바뀐 게 자신도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페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을 끝까지 교체하지 않았다. 안정환은 다음 날 인터뷰에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만약 교체돼 나왔더라면 페널티킥 실축이 살면서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2년 2월 29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한국과 쿠웨이트의 최종전 하프타임때 안정환의 은퇴식이 열렸다. 부인 이혜원씨와 함께 그라운드에 나온 안정환은 자신의 선수시절 영상을 보며 울먹였다. 부산, 페루자(이탈리아), 시미즈, 요코하마(일본), 메츠(프랑스), 뒤스부르크(독일), 수원, 부산, 다롄(중국)에서 선수생활을 한 안정환은 프로기록 283경기 88골, A매치 71경기 17골, 월드컵에서 세 골을 기록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안정환은 가장 빛난 선수였다. 추억의 '반지 키스'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안정환은 이제 발이 아닌 입으로 월드컵을 치른다. 골든골처럼 반짝거리는 그의 어록이 또 탄생할 지도 모른다. 2014브라질월드컵에 출전하는 태극전사 후배들의 멋진 활약을 '독려'하면서 말이다. 정재근기자 cj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