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브라질 월드컵 엔트리' 발표. 극심한 후폭풍이 따랐다. 축구팬 반응 속에서 인맥 이야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인신공격성 발언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열린 그 어떤 월드컵보다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느낌도 들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불만의 근원엔 홍명보 감독이 직접 언급한 '선수 선발 기준'이 있다.
논란의 한가운데 이명주가 있다. 2014 K리그클래식 10라운드 현재, 4골 7도움. 2라운드부터 무려 9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K리그 통산 다섯 번째, 10일 전남전에서 공격 포인트 추가 시 기록 경신). 황선홍 포항 감독이 "현재 K리그에는 이명주만큼 잘하는 선수가 없다."라며 극찬했을 정도. 이 선수의 활약에 포항은 외국인 선수 하나 없이 리그 1위-AFC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안착했다. 스탯만 쌓은 게 아니다. 삼각형 형태로 꾸린 중원 조합 중 아랫선, 윗선 가리지 않고 두루 활용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까지 지녔다. 이런 유능한 미드필더를 브라질에서는 볼 수 없다.
포지션 및 임무 분담에 따라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월드컵 같은 큰 대회라면 특히 더 하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한 축은 기성용 담당이다. 볼을 소유하고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 정확한 패스 공급에 중거리 슈팅 및 세트피스 킥 옵션까지 갖췄으니 대체 자원이 마땅치 않다. 이 선수를 공격 전환 과정에 오롯이 활용하기 위해선 수비 분담을 줄여주는 것이 핵심. 여기엔 한국영이 적격이다. 상대의 볼 줄기를 예측하고, 모조리 빨아들이는 수비력은 대표팀 내 최고다. 홍 감독 역시 기성용-한국영 조합으로 2012 런던 올림픽을 준비했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이 조합은 한국영의 왼발 중족골 부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고려할 요소도 있다. 한국영의 터프한 수비로 러시아-알제리-벨기에로 이어지는 3연전을 버틸 수 있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몸으로 부딪히는 도전적인 수비 형태는 경고 부담을 안고 있다. 앞선 두 경기에서 경고를 한 장씩 받는다면 벨기에전을 한국영 없이 싸울 수도 있다. 중앙으로 꺾어 들어오는 데 능한 아자르가 이 진영을 초토화할 경우 중앙 수비가 무너질 공산은 급격히 증가한다. 이 부분에서라면 런던 올림픽에서 재미를 봤던 박종우의 수비 능력에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볼 수 있다. 여기에 홍 감독이 "기성용의 대체 자원"이라고 꼽은 하대성까지 있다. 즉, 이명주가 공격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만한 여건이 아니다.
공격형 미드필더는 구자철과 김보경이 꿰찼다. 두 선수의 지난 시즌이 썩 인상적이었던 건 아니다. 부상, 감독 교체 등 여러 문제가 덮쳤고, 경기 출장은 들쑥날쑥했다. 이를 대비해 이명주를 전진 배치해볼 기회가 1월 전지훈련 중에 있었다. 하지만 "(이명주에게)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요구했는데 선택을 받지 못했다."라는 홍 감독의 인터뷰를 봤을 때, 이미 이 카드는 선택지에서 빠져 있었다. 당시 전방은 김신욱과 이근호의 몫이었고, 이명주는 박종우와 짝을 이뤄 아래 진영에서 움직였다. 이러한 홍 감독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고유 권한이다. 해당 위치에 써본 적도 없는 선수를 월드컵에 데려가라고 강요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홍 감독이 대표팀을 떠안은 건 지난해 6월 말이었다. 팀의 주축인 유럽파를 제대로 가동할 기회는 아이티전부터 크로아티아전, 브라질전, 말리전, 스위스전, 러시아전, 그리스전까지 고작 7회였다(동아시아컵 및 전지훈련 제외). 이마저도 부상 및 SNS 파동 등의 변수로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튀니지전(28일), 가나전(내달 10일)만 치르고 난 뒤엔 곧장 월드컵 본선이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큰 그림을 그리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홍 감독 본인이 소상히 꿰고 있는, 이미 검증된 자원을 불러들이는 것이 확률적 싸움에서 승산이 높았을 터. 2년 전 성공 가도를 달린 런던 올림픽 멤버와의 연속성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너무 거창한 원칙을 내세워 온 건 아닐까. '원 팀, 원 스피릿, 원 골(One Team, One Spirit, One Goal)'을 주창한 홍 감독은 지난해 8월 "기본 원칙은 팀에서 경기를 나가지 않은 선수는 될 수 있으면 대표팀에 부르지 않을 생각이다."라며 자신을 옭아맸다. 이후 한 시즌 3경기 출장(선발 1경기)에 그친 박주영이 조기 귀국해 개인 훈련을 시작했고(선수의 능력 및 발탁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 K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로 발돋움하던 이명주는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 과정에서 2009 이집트 U-20 월드컵,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2 런던 올림픽을 거친 '홍명보의 아이들' 중 몇몇은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공식 석상에서 입 밖에 낸 말을 스스로 번복했다. 깨질 수도 있었던 무리한 원칙을 제시했고, 이는 결국 '독'이 돼 돌아왔다. 특정 선수의 엔트리 제외가 극심한 반향을 몰고 온 지금, 홍 감독은 더욱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됐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행보로 말이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