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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감독의 '희생', LG '회생'의 밑거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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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는 '희생'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자를 다음 베이스로 보내기 위해 스스로 아웃을 감수하는 행위를 높게 쳐준다. 팀을 위한 행위라고 판단해 개인 타격 기록에 손해가 가지 않도록 별도로 표시한다. 이런 '희생'이 많이 나오는 팀은 응집력이 강하다.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하나가 팀 분위기를 확 바꿔놓기도 한다.

▶LG를 바꿔놓은 김기태의 '희생'

시즌 초반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던 LG는 지난주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난 23일 김기태 감독이 자진 사퇴를 선언했다. 팀이 불과 20경기도 치르지 않은 시점. 감독은 "지금 팀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감독인 내가 사퇴하는 것 뿐"이라며 프런트의 만류를 뒤로 한 채 스스로 물러났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김 감독의 스타일을 아는 대다수 야구인들은 "김기태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라고 평했다. 팀을 살리기 위해 비록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희생'을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김 감독의 '희생'이 LG의 전환점이 됐다. 감독 사퇴 이후 조계현 수석코치의 대행 체제 속에서 LG는 5연패로 바닥을 찍더니 반등세를 탔다. KIA를 상대로 시즌 첫 위닝시리즈까지 달성했다. LG는 2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2대1로 역전승을 거둬 KIA와의 주말 3연전을 2승1패로 마감했다. 여전히 순위는 9위지만, 이 위닝시리즈는 LG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응집력과 뒷심이 살아난 LG

김 감독이 처음으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야구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지난 23일 대구 삼성 라이온스전. 이날 LG는 3대7로 졌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집중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24일 삼성전은 더 심했다. LG는 5-3으로 앞서던 7회말 4점을 내주며 5-7로 역전당했지만, 곧 이어진 8회초에 대거 3점을 뽑으며 8-7로 경기를 다시 뒤집었다. 하지만 9회말 마무리 봉중근이 밀어내기로 동점을 허용하더니 이어진 연장 10회말에 3연속 안타로 결국 8대9로 졌다. 최악의 패배다.

그러나 이 경기 후 LG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 홈구장인 잠실로 무대를 옮긴 25일. 감독 사퇴 후 사흘째가 되자 혼란은 잦아들고, 선수들은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반신반의했던 감독의 사퇴를 현실로 받아들인 시점이다. 한결같이 '김기태 감독님을 위해서'라는 모토에 젖어들었다. 시즌 초반 모래알같던 팀 분위기가 모처럼 한 뜻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LG는 25일 KIA에 3대2의 역전승을 거뒀다. 그런데 이 3점이 모두 2사 후에 나온 점수다. 0-2로 뒤진 5회말 2사 후 오지환이 볼넷으로 나간 뒤 2루를 훔쳤고, 박용택의 적시타로 홈을 밟았다. 7회에도 2사 후 이진영의 볼넷 이후 윤요섭, 오지환의 연속 안타가 나오며 동점을 이뤄냈다. 8회에는 1사 1, 2루에서 김용의의 투수 앞 땅볼 때 2루 주자 박용근이 3루에서 아웃됐다. 2사 1, 2루로 득점 확률이 확 줄었지만, LG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타 이병규(9)의 몸에 맞는 볼로 만루 기회를 만든 뒤 이진영이 볼넷을 골라내 밀어내기로 결승점을 뽑았다.

▶역전으로 일궈낸 첫 위닝시리즈

26일 경기에 패한 뒤 27일에도 경기 막판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다. 팽팽한 투수전 끝에 KIA가 8회초 김주형의 솔로홈런으로 선취점을 냈다. 남은 LG의 공격 기회는 8회말과 9회말, 두 차례 뿐. 그러나 LG는 곧바로 8회말에 역전에 성공했다. 선두타자 손주인이 좌전안타를 쳐 불씨를 살렸다. 이어 조쉬벨의 1루수 땅볼 때 대주자 박용근이 2루까지 나갔다.

1사 2루. 스코어링 포지션에서 4번 정의윤이 좌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정의윤은 공이 홈으로 향하는 틈을 타 2루까지 달렸다. 이어 이진영의 중전안타가 나와 1사 1, 3루. 여기서 대타로 나온 이병규(9)가 2루수 쪽 내야 땅볼로 3루 주자를 홈에 불러들여 역전.

전세를 뒤집었지만, 1점차는 안심할 순 없다. 하지만 LG의 수문장 봉중근이 다시 투혼을 보였다. 25일에도 세이브를 달성한 봉중근은 9회에 나왔는데,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안타와 고2루 견제 실책에 고의 4구까지. 순식간에 1사 1, 3루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마지막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특유의 기민한 1루 견제로 KIA 대주자 강한울을 잡아내며 2사 3루로 위기의 강도를 낮췄다. 이어 박기남에게 볼넷을 허용했지만, 안치홍을 우익수 파울 플라이로 처리하면서 경기를 끝냈다. 시즌 첫 위닝시리즈를 달성한 장면이다.

▶LG의 변화, 지속성이 관건

분명 김기태 감독의 사퇴는 LG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꾼 계기가 된 것이 틀림없다. 선수들의 표정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독기가 배어나온다. 경기 막판 역전으로 일궈낸 첫 위닝시리즈는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관건은 과연 이런 LG 선수단의 결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다. 김기태 감독의 사퇴로 비롯된 이 투지와 응집력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즌 끝까지 이어지기란 무리다. LG는 이제 겨우 22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아직 106경기가 남았다.

결국 남은 106경기를 힘있게 치러낼 수 있는 지속가능한 동력원을 찾는 게 LG의 새로운 숙제다. 모처럼 하나가 된 선수단의 투지를 가능한 한 오래 끌고가야 한다. 이게 바로 공석인 감독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조계현 수석코치와 LG 프런트의 공통된 과제다. 일단 전환점은 생겼다. 이 변화의 흐름을 힘있게 끌고갈 수만 있다면, LG는 분명 지난해의 저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힘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LG는 다시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

잠실=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