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이 마지막이자 유일한 메달이었다.
전이경(38)이 1998년 나가노대회(일본)에서 여자 500m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러나 어부지리였다. 당시 전이경은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결선 출전 4명 중 3, 4위가 실격을 당하며 행운이 찾아왔다. 전이경은 순위 결정전에서 1위를 차지해 운좋게 시상대에 올랐다.
단거리인 500m는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숙원이었다.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금메달을 놓쳤다.
박승희(22·화성시청)가 13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벌어진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선에서 54초207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이상화(25·서울시청)에 이어 한국 선수단에 두 번째 메달을 선물했다.
그러나 통한의 동메달이었다. 결선까지의 여정은 순풍에 돛 단 듯 거침이 없었다. 대회 전부터 길조가 보였다. 500m는 왕멍(29·중국)의 천하였다. 2006년 토리노, 2010년 밴쿠버에서 2연패에 성공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도 500m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랭킹 1위, 아성이었다. 하지만 소치에 왕멍이 없었다. 지난달 훈련 도중 오른쪽 발목이 부러지며 올림픽 출전 꿈을 접었다.
박승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소치 조직위원회가 대회 자료를 배포하는 공식 인포에서도 500m 우승후보로 꼽혔다. 조직위는 '500m 랭킹 1위이자 최강 왕멍의 부상 불참으로 박승희가 한국에 이 종목 첫 번째 금메달을 안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춘추전국시대였다. 올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랭킹만 보면 왕멍에 이어 판커신(중국)과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가 2, 3위에 포진했다. 호재는 이어졌다. 박승희는 준결선 1조에서 1위로 결선 진출에 성공했다. 2위가 폰타나였다. 뒤이어 열린 2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판커신이 넘어져 결선 진출이 좌절됐다. 중국 선수 3명이 같은 조에 포진했지만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했다. 엘리스 크리스티(영국)와 리지안러우(중국)가 결선에 올랐다.
출발 자리도 똑 떨어졌다. 준결선에 가장 빨린 결승선을 통과한 박승희는 1번에 위치했다. 500m는 자리싸움이 첫 번째 승부처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그러나 시련이 기다렸다. 부정 출발로 무겁게 첫 발을 뗐지만 선두를 꿰찼다. 하지만 두 번째 코너를 돌다 넘어졌다. 엘리스와 폰타나가 자리다툼을 하다 엘리스가 박승희를 쓰러뜨렸다. 펜스에 강하게 부딪힌 그는 일어나 레이스를 이어가려다 또 넘어졌다. 마음이 바빴다. 되돌릴 수 없었다. 단거리라 회복되지 않았다. 4명 중 맨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엘리스가 실격을 당하면서 동메달이 돌아갔지만 아픔이 큰 일전이었다. 리지안러우의 금메달, 폰타나의 은메달은 변하지 않았다.
레이스가 끝난 뒤 조해리를 안고 울었다. 억울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의연한 모습으로 "안타깝지만 후회는 없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박승희는 다관왕을 노리는 후배이자 1000m와 1500m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 심석희(17·세화여고)에게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주신다"고 조언했다. 메달에 집착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먼저라는 뜻이었다. 메달은 그 다음 문제다. 쇼트트랙은 변수의 종목이다. 언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른다.
4년 전의 아픔으로 얻은 교훈이었다. 박승희는 밴쿠버올림픽에 출전했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하지만 여자대표팀은 중국의 덫에 걸리며 금메달 수확에 실패했다. 3000m 계주가 뼈아팠다. 여자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이 없었던 것은 1992년 알베르빌대회(프랑스) 18년 만이었다. 박승희는 유일하게 멀티 메달(동메달 2개)을 목에 걸었지만 아픔이 컸다.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주신다고 믿었다.
그의 레이스가 그랬다. 소치(러시아)=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