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밴쿠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의 쌍두마차는 이규혁(36·서울시청)과 이강석(29·의정부시청)이었다.
그는 '미완의 대기'였다. 스포트라이트에서 자유로웠던 그가 대형사고를 쳤다. 태극기를 휘감고 막춤을 추는 그의 활달한 모습에 대한민국도 함께 춤을 췄다. 4년 전의 모태범(25·대한항공)이었다.
소치에선 4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을 바랐다. 그러나 세상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강한 긍정은 부정이 된다. "4년 전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오히려 편하게 준비하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초조, 불안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정신없이 갔다. 매년 실패도, 경험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소치올림픽이 왔다. 최대한 실수를 줄이고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다. (이)승훈이랑 이런 얘기를 했다. 얼음판 올라가자마자 밴쿠버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부담감은 어쩔 수 없었다.
소치에서의 첫 레이스는 좌절이었다. 디펜딩챔피언 모태범이 11일(이하 한국시각)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1·2차레이스 합계, 69초69를 기록하며 4위를 차지했다. 메달권에 0.23초 모자랐다. 또 다시 네덜란드 천하였다.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 했다. 미셸 뮬더가 69초312로 금메달, 얀 스메켄스와 로날드 뮬더가 69초324, 69초46으로 각각 은, 동메달을 차지했다.
잘 탔다. 모태범의 기록은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때의 기록(69초76)보다 좋았다. 1차 레이스에서의 마지막 1바퀴 기록(25초16)은 기록 잘 나오기로 유명한 캐나다 캘거리나 미국 솔트레이크시티를 제외하면 그동안 모태범이 보여준 레이스 가운데 높은 수준이었다.
다만 스타트가 옥에 티였다. 모태범은 1차 레이스에서 9초68의 100m 랩타임을 기록했다. 1차 레이스 100m 랩타임에서 9초53으로 1위를 차지했던 나가시마 게이치로(일본)에 비해 0.15초나 늦었다. 1차 레이스 결과 5위권에 든 선수들 가운데서 100m 랩타임이 가장 느렸다. 2차 레이스도 마찬가지였다. 100m 랩타임은 9초63이었다. 2차 레이스 100m 랩타임 최고를 기록한 스미켄스(9초53)에 비해 0.1초나 느렸다. 자신의 1차 레이스 100m 랩타임과 비교해서도 0.05초를 줄이는데 그쳤다.
지난해 소치 세계선수권대회 때 기록한 스타트 기록(1차·9초59, 2차·9초56)보다 뒤떨어진다. 1000분의 1초차로 희비가 엇갈리는 종목이 500m다. 초반에 가속도를 붙이지 못하다 보니 더 빠르게 스케이트 날을 지치지 못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 삼총사의 경기력이 워낙 좋았다.
모태범을 지도하는 케빈 크로켓 코치(40·캐나다)는 "모태범이 최근들어 이런 레이스를 펼친 것을 본 적이 없다. 최고의 스케이트는 아니었다"며 아쉬워했다. 18위에도 아름답게 500m와 이별한 이규혁(36·서울시청)은 "4위도 잘한 것이다. 1000분의 1초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기록 경기다. 사실 태범이는 4년 전에는 운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력으로 정상권에 있었다. 오늘은 모태범이 아니었다"며 "4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록 경기는 오늘,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오늘만 잘못된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모태범은 실망스럽고, 속상했다.그는 아무런 말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표정은 굳었고,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정상에 서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힘들다. 모태범도 뼈저리게 느꼈다.
이미 흘러간 과거다. 이제 1000m가 남았다. 12일이다. 500m보다 더 욕심을 내는 종목이다. 밴쿠버에선 10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500m를 훌훌털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도전자의 입장에서 즐거운 경쟁을 펼치면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소치(러시아)=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