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26·대한항공)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국의 소치동계올림픽 첫 금메달 도전에 나섰던 스피드스케이팅 5000m에서 12위에 그친 직후다. 모태범(25·대한항공)은 아무 말 없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굳은 표정에 입을 열지 못했다. 밴쿠버올림픽 500m 챔피언인 모태범은 소치에서 4위로 레이스를 끝냈다.
고개를 숙인 후배들을 바라보는 '맏형'의 마음이 좋을 리 없다. 그 역시 6번째 참가한 소치동계올림픽 500m 무대에서 18위에 그쳤다. 그러나 '맏형' 이규혁(36·서울시청)은 후배들에게 경험으로 느낀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이승훈과 모태범 모두 경기를 마치고 표정이 어둡더라.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오늘 하루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다."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했다. 한국 빙상의 간판이자 희망인 이승훈과 모태범이 느끼는 중압감의 무게를 이규혁도 잘 안다. 비록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비로소 축제를 즐기게 됐지만 이규혁도 이전 올림픽까지 뼈저리게 느꼈던 중압감이다. 이규혁은 500m 레이스를 마친 뒤 "홀가분하다"고 했다. 이어 "이제껏 메달 집착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았다. 솔직히 욕심이 났고 그래서 늘 상황이 힘들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다들 즐기고 오라고 해서 오늘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느낀다"며 "요즘은 긴장감 없이 훈련이 끝나면 지쳐 뻗어 잔다. 예전에는 왜 그렇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올림픽이 갖는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이규혁은 "모두 4년을 열심히 준비해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은 인정받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배들의 남은 레이스를 위해 '맏형'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규혁은 "4위도 잘한 것이다. 0.00초 차이로 희비가 엇갈린다. 태범이는 4년 전에는 운이 많았다. 이번에는 실력으로 정상권에 있었다. 오늘은 모태범이 아니었다. 4위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스피드 스케이팅은 기록 경기다. 오늘, 내일 어떻게될지 모른다. 오늘만 잘못된 것"이라 재차 강조했다.
모태범과 이승훈의 올림픽은 이제 절반만 끝이 났을 뿐이다. 모태범은 12일 시작되는 1000m에서 메달에 다시 도전한다. 이승훈은 18일 4년 전 금메달을 목에 걸은 1만m에 이어 21일 팀추월에도 출전한다.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