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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막전막후]이승훈의 고독한 싸움, 결국은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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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메달의 환희는 없었다. 그가 받아든 첫 번째 성적표는 12위였다. 이승훈(26·대한항공), 그의 얘기를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달랐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선 무명이었다. 누구도 그의 메달을 예상하지 않았다.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지 1년밖에 안된 '왕신인'이었다. 쇼트트랙 대표선발전서 탈락한 후 오로지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전향했던 스피드스케이팅이다.

부담이 없었다. 단 그는 믿음이 있었다. 지구력과 쇼트트랙에서 익힌 코너링이 승부수였다. 코너를 돌며 속도를 올렸고, 직선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스케이팅을 했다. 전략은 기가 막히게 떨어졌고, 스피드스케이팅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는 밴쿠버올림픽 50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었다.

4년이 흘렀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의 문이 열렸다. 첫 주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사이 기대치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부담은 컸다. "4년 전보다 첫 경기를 앞두고 부담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림픽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하겠다." 말을 그랬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과 번뇌가 느껴졌다.

부담은 독이 됐다. 즐기려고 했지만 즐기지 못했다. 컨디션 조절을 위한 훈련은 지나치리 만큼 가벼웠다. 그는 유럽 선수들의 전유물인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선구자다. 5000m 은메달은 물론 1만m 금메달도 그가 최초였다.

물론 할 것은 했다. 지난달 22일 가장 먼저 출국했다. 해발 1800m인 프랑스 퐁트 로뮤에서 쇼트트랙대표팀과 함께 고지대 훈련을 했다. 밴쿠버 당시 고지대 훈련의 성과에 독자행보를 했다. 하지만 홀로 걸을수록 뭔지 모를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이승훈은 8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아들레르 아레나에서 열린 5000m에서 6분25초61의 기록으로 12위에 머물렀다. 한국 선수단 첫 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시상대는 네덜란드의 판이었다. 금, 은, 동을 싹쓸이 했다. 클래스가 다른 레이스를 펼친 스벤 크라머가 6분10초76으로 밴쿠버에서 자신이 세운 올림픽 기록(6분14초60)을 갈아치웠다. 올림픽 2연패에 성공했다. 복병인 얀 블로쿠이센(6분15초71)이 은, 이승훈과 2위를 다툴 것으로 예상된 요리트 베르그스마(6분16초66)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작전보다는 고독한 심리싸움에서 실패했다. 조추첨에서 마지막 조에 배정된 것도 결국 독이었다. 네덜란드 선수들의 선전에 흔들렸다. 3000m 이후의 폭발적인 스퍼트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밴쿠번 당시 이승훈의 기록은 6분16초95였다. 1800m를 2분18초80으로 주파 후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조금씩 기록을 줄여나갔다. 3000m를 3분48초56에 끊으면서 메달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3400m부터 줄곧 2위를 유지했다. 마지막 세바퀴에서 29초51, 29초54, 29초26을 찍으며 경쟁자들보다 1초가량 빠른 랩타임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반면 소치에선 막판 스퍼트가 실종됐다. '슬로우 스타트'에도 뒷심을 기대했지만 후반부 레이스가 더 부진했다. 마지막 세바퀴 기록이 31초49, 31초73, 32초63으로 저조했다. 함께 레이스를 펼친 패트릭 베커트(독일·6분21초18)보다도 늦게 들어왔다.

그도 아팠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선 취재진의 인터뷰 요구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허탈하게 웃는 모습에서 진한 아쉬움이 풍겼다.

밴쿠버에서 이승훈을 지도한 김관규 대한빙상경기연맹 전무는 SBS 해설위원으로 변신해 소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선수가 레이스를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승훈이는 원래 3000m 이후 빨라져야 하는 스타일인데 그렇지 못했다"며 "심리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자신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한 상대 선수가 계속 레이스를 이끌면서 급격히 긴장했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쳤다면 메달권에 들었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승훈은 18일 4년 전 금메달을 목에 걸은 1만m에 이어 21일 팀추월에도 출전한다. 5000m는 하루 빨리 잊을수록 좋다. 자신감 넘치는 새 출발, 이승훈이 풀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과제다. 그래야 올림픽을 즐길 수 있다. 메달은 그 다음이다. 소치(러시아)=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