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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소치, 응답하라 2014]④성은령, 1000분의 1초 줄이기 위해 하루 여섯끼 흡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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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로 스물세살 여대생의 눈에 예쁜 옷들이 아른거렸다. 한껏 멋도 부리고 싶은 나이였다. 눈물을 머금고 예쁜 옷들을 애써 외면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매일 살을 찌우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먹고 또 먹었다. 하루에 6끼를 먹었다. 야식 라면은 필수였다. 단백질 보충제도 물에 타서 마셨다. 몸을 불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는 성은령(22·용인대)이었다. 성은령이 치열하게 몸을 불리는 이유는 다 하나였다. '최초'라는 타이틀이었다.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동계올림픽 루지에 출전하는 여자 선수인 성은령은 "여자 썰매 최초로 올림픽에 나갔다고 역사에 이름을 새기는 거잖아요"라며 말했다.

루지에서 몸 불리기는 필수다. 루지는 무거울수록 빨라진다. 선수의 몸무게가 더 나갈수록 썰매에 가속도가 붙는다. 1000분의 1초를 줄이기 위해 1㎏이라도 더 늘리는데 힘쓴다. 세계 정상권에 있는 올레나 슈쿠모바(우크라이나)의 체중은 87㎏이다. 다른 선수들도 대부분 70~80㎏사이다. 성은령도 이들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워낙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여기에 어렸을때부터 각종 운동으로 몸이 단련되어 있었다. 몸을 불린다고 불렸지만 몸무게는 58㎏에 불과하다. 이 종목에서 가장 가벼운 선수다. 10㎏의 납조끼를 입어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가볍다.

비록 체중 증가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은 가볍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성은령은 루지를 몰랐다.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로, 이후에는 태권도 선수로 뛰었다. 2011년 용인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엘리트 선수는 아니었다. 그저 입시 체육을 통해 체육학과에 들어간 평범한 학생이었다. 루지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봤던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는 피겨 스케이팅과 스피드 스케이팅, 쇼트트랙에 열광했다. "루지를 스쳐지나가면서 봤는데 별 감흥은 없었어요. 그저 봅슬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루지와의 만남은 2011년이었다. 대학 입학 후 지루함이 컸다. 뭔가 독특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던 순간 루지 국가대표선발전 공고를 우연히 봤다. "공고를 보는 순간 나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밴쿠버올림픽에서 봤던 기억도 어렴풋이 났어요." 성은령은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선발전을 치렀다. 합격 통보가 왔다. 태극마크를 달았다.

처음에는 후회도 많았다. 국가대표라면 당연히 태릉에서 훈련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서울에서만 3시간 떨어진 강원도 평창이었다. 유니폼도 없었다. 자신의 운동복을 입고 훈련했다. 국내에 트랙이 없어서 한여름 아스팔트에서 바퀴 달린 썰매를 탔다. 선배들이 사용하던 헬멧을 물려 쓰고 다른 나라 선수들이 타던 중고 썰매를 4명의 선수가 돌아가며 타는 게 실전 훈련이었다. 대표선수라지만 초보자에 가까운 선수들이 낡은 장비로 훈련하니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연거푸 전복 사고를 내자 선수의 안전을 염려해 국제루지연맹(FIL)에서는 대회 참가를 말리기도 했다. "그때는 국가대표가 맞나라는 자괴감도 들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래도 성은령은 굴하지 않았다. 루지의 매력에 푹 빠졌다. "코스를 탈 때 조종의 타이밍이나 강도를 잘 맞춰야해요. 이런 것을 퍼즐처럼 맞춰가는 것이 재미있어요"라고 밝혔다. 기왕에 시작한 루지로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많은 훈련량으로 기량을 끌어올렸다. 2011년 말 성은령은 아시안컵에서 여자 싱글 주니어 금메달을 따냈다. 2013년 2월 세계선수권대회 팀 계주 10위와 12월 월드컵 팀 계주 8위를 기록하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주변 환경도 조금씩 좋아졌다. 스타트 훈련장도 생겼다. 후원을 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하지만 여전히 여름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바퀴달린 썰매를 탔다. 그래도 자신들의 몸에 맞는 썰매를 갖게 됐다. 구멍나지 않은 멀쩡한 장갑과 반짝거리는 헬멧도 갖게 됐다. 2013년 8월에는 독일 출신 슈테펜 자르토르 코치가 합류했다.

지원이 좋아진만큼 성은령은 이번 올림픽 목표도 높게 잡았다. 싱글 20위권 내 진입 그리고 팀계주 10위권 내 진입이다. 물론 쉽지 않다. 성은령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불모지에서 시작했어요. 지금 환경을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천국이에요. 환경도 좋아진만큼 후회없는 한 판을 하고 돌아올께요. 한국 루지가 살아있음을 보이고 돌아올께요." 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