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 생긴 꿈, 그렇게 시작됐죠
박- 마흔이 넘는 나이에 한복 디자이너가 되셨다고 하던데요.
이- 큰 애가 고등학교 때 시작했죠. 그 전에는 빨래하고, 밥하고 여느 주부들처럼 살았죠. 그러다 어느 날 기회가 왔어요. 남편의 직업이 공무원이었는데, 아이들 과외를 시키고 싶었죠. 하지만 공무원 월급으로는 택도 없었죠.
그 때 사촌 언니가 명주 솜을 저한테 보내주면 팔아달라고 부탁 한거죠. 그때가 35살 쯤이었는데, 처음에는 사촌 언니가 좋아서 돕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1년 정도 파니깐 한 달에 1000개 정도를 팔았죠. 돈이 많이 남더라고요.
박- 수완이 좋으세요.
이- 1년정도 파는데 싫증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염색을 해서 이불을 만들어서 팔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생각을 말했더니 사촌언니가 '너무 좋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염색한 이불을 팔았더니 그 전보다 3배, 4배 팔리더라고요.
박- 감각이 탁월하시네요.
이- 어려서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염색을 직접 해 저고리나 한복을 만들어줬어요. 그것을 계속 지켜보면서 배운거죠. 덕분에 색을 기막히게 뽑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죠. 어릴 때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죠.. 여튼 이불을 너무 많이 팔아서 수유리에서 서교동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갔죠. 그리곤 사단법인 한복 연합회가 생겼는데, 운이 좋게도 10명을 뽑는데 뽑혔어요. 그 때 쇼를 했는데, 제 한복이 가장 아름다웠다는 평가를 받게 됐어요. 그래서 방송사에서 인터뷰까지 하게 됐고,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풀렸죠.
박-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한복집에서 일 한것도 아닌데요.
이- 전혀 상관없죠. 언니의 명주솜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죠. 염색한 천으로 이불을 만들다가 남은 천이 아까워서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었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리고 서교동에서 유명한 한복집에서 한복을 팔았는데, 대히트를 쳤죠.
박- 한복을 만든 당시에 몇 살이셨나요?
이- 마흔이었어요. 그렇게 돈을 벌어서 남편도 모르게 내 가게를 차렸어요. 한복집 앞에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박- 맛있는 빵집에 아침에 줄을 서듯이요.
이- 전국에서 찾아와서 기다렸어요.
박- 돈을 많이 버셨겠어요.
이- 그렇죠. 하지만 한복으로 번 돈을 한복 패션쇼에 쏟아부었죠.
박- 당시에 한복 패션쇼 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을텐데요. 주변의 우려는 없었을까요.
이- 돈도 많이 들었지만, 한복으로 무슨 쇼냐고 웃음꺼리라고 손가락질 했던 분들도 계시죠. 그래도 쇼를 열었어요. 파리에서 첫 쇼가 끝나고 '자연과 하나 된 옷'이라며 호평이 이어졌었죠.
박-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쇼를 하려고 했나요.
이- 1988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렸죠. 많이 알리고 싶었어요. 가난한 우리나라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했거든요. (3편에 계속)
김겨울기자 winte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