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의, 리즈에 의한, 리즈를 위한 경기였다.
LG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린 17일 잠실구장의 밤기온은 섭씨 13~15도를 오르내렸다. 바람도 다소 강하게 불어 체감기온은 그보다 낮았다. 모든 선수들이 긴소매 셔츠를 입고 출전을 했는데, 한 선수만은 반소매 차림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LG 선발투수 리즈였다. 리즈는 열대기후 지역인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이지만, 메이저리그 시절 가을에 쌀쌀하기로 소문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뛴 경험이 있어 한국의 가을밤 날씨가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게 차명석 투수코치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의 피칭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반소매'가 아니라 두산 타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구위와 제구력이었다.
리즈는 8이닝 동안 단 1개의 안타와 2개의 볼넷을 내주는 완벽한 피칭으로 자신의 한국 무대 포스트시즌 첫 등판서 선발승을 따냈다.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오른 LG의 첫승이기도 했다. 리즈를 앞세운 LG는 2대0으로 두산을 완파하고 시리즈 전적 1승1패로 균형을 맞췄다. LG가 포스트시즌 승리를 거둔 것은 지난 2002년 11월8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 이후 3996일만이다. 리즈는 107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삼진 10개를 잡아냈고, 리즈를 상대로 2루를 밟은 두산 선수는 5회 이원석 단 한 명뿐이었다. 올 정규시즌서 리즈는 10승13패, 평균자책점 3.06을 올렸고, 202⅔이닝 동안 188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투구이닝과 탈삼진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리즈의 단점은 경기마다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다. 잘 던지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 투구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이날은 소위 '긁히는 날'이었다.
▶알고도 못치는 광속구
경기전 두산은 슬라이더는 버리고, 직구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리즈 공략 계획을 세웠다. 아무래도 리즈가 직구를 70% 정도 던지는데다 실투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리즈는 투구수 107개 가운데 직구 73개, 커브 10개, 슬라이더 21개, 포크볼 3개를 각각 던졌다. 직구 비율이 68.2%였다. 리즈의 직구는 제구력까지 동반될 경우 알고도 못치는 경우가 많다. 철저한 코너워크와 스피드를 당해낼 타자는 거의 없다.
이날 전광판 기준 리즈 직구의 최고 구속은 160㎞였고, 대부분 150㎞대 중반에서 형성됐다. 1회 선두 이종욱을 볼카운트 1B2S에서 7구째 136㎞짜리 몸쪽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기 전, 리즈는 1~3구, 6구를 바깥쪽 직구로 던졌다. 이종욱은 그가운데 3개를 파울로 걷어냈다. 직구 타이밍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 몸쪽을 파고들며 떨어지는 결정구, 슬라이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건 바로 직구였다. 2번 정수빈과의 대결에서도 볼카운트 1B2S에서 4구째 바깥쪽으로 159㎞짜리 직구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해 삼진을 잡아냈다. 발빠르고 맞히는 능력이 탁월한 두산 테이블세터를 1회 제구력이 뒷받침된 강력한 직구로 요리, 리즈는 초반 분위기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타격 기계도 움찔하게 만든 몸쪽 승부
이날 리즈 피칭의 압권은 두산의 간판타자 김현수와의 승부였다. 1회 바깥쪽으로 138㎞짜리 슬라이더로 유격수 땅볼로 처리한 리즈는 4회 두번째 대결에서는 철저한 몸쪽 승부로 일관하며 힘대결에서 압도했다. 초구 131㎞짜리 커브 파울에 이어 2구째부터 4개의 공을 모조리 직구로 던졌다. 볼카운트 1B2S에서 5구째 157㎞ 직구를 몸쪽 스트라이크존으로 바짝 붙여 김현수의 헛스윙을 유도하며 삼진 처리했다. 김현수는 잠시 리즈를 바라본 뒤 혀를 내두르며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7회 세 번째 대결에서는 레퍼토리를 바꿨다. 1회 이종욱과의 대결처럼 초구부터 5구째까지 150㎞대 중반의 강속구로 볼카운트 1B2S를 만든 뒤 6구째 137㎞짜리 몸쪽으로 원바운드에 가깝게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또다시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김현수는 몸쪽 코스에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노리고 칠 경우 장타도 날릴 수 있는 타자다. 직구에 익숙해진 김현수의 감을 리즈가 역이용한 셈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나
리즈는 전형적인 강속구 투수로 하체와 어깨의 근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경기 후반 스태미나가 떨어져 제구가 흔들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LG는 이에 대해 손가락의 악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몸쪽으로 강속구를 붙일 경우 뜨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때문이다. 지난 9월8일 잠실 삼성전에서 배영섭의 헬멧을 맞힌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날 리즈의 제구력과 공끝의 묵직함, 스피드는 8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8회 2사후 대타 최주환을 헛스윙 삼진 처리할 때 던진 직구는 154㎞를 찍었다. 7회 김현수를 삼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던진 4구째 직구는 160㎞을 찍었다. 리즈가 실전 마운드에 오른 것은 지난 3일 잠실 한화전 이후 2주만이었다. 그동안 3번의 불펜피칭을 실시했고, 독립리그 고양 원더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 실전 감각을 유지했다. 휴식기간에 완벽한 컨디션을 만들어 이날 호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리즈는 경기후 "한국에서 포스트시즌 첫 등판이었지만,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불펜피칭 3번과 연습경기 1번 등판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푹 쉬는 것에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잠실=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