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영화'가 운명을 바꾸고 있다.
그동안 충무로에서는 감독이 교체된 영화는 흥행면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작품들은 '감독 교체=흥행 참패'라는 공식을 뒤엎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짜임새 있는 구성,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호응을 이끌어내 관심을 끈다.
2008년 개봉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안권태 감독에서 곽경택 감독으로 메가폰이 넘어간 케이스다. 영화는 205만 8764명의 관객(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을 모으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지만, 곽경택 감독이란 걸출한 연출자와 한석규 차승원 등 최고 인기 배우들이 힘을 합친 것 치고는 사실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다. 지난해 개봉한 고현정 주연의 영화 '미쓰고'도 마찬가지다. '미쓰고'는 정범식 감독에서 박철관 감독으로 연출자가 교체됐다. 고현정의 첫 상업 영화 도전이란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음에도 61만 1685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그런데 최근엔 기류가 바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감독이 교체되는 비운을 겪었음에도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들이 탄생하고 있다. 지난 6월 개봉한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전재홍 감독이 연출하기로 했지만, 중간에 장철수 감독으로 교체됐다. 그러나 영화는 '김수현 신드롬'을 일으키며 695만 9083명의 관객을 동원,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4위에 안착했다.
5일 개봉한 '스파이' 역시 마찬가지다. '스파이'는 당초 이명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당시 영화명은 '미스터K'.하지만 이 감독은 제작사 JK필름 측과 영화를 보는 시각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감독 해고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제작사는 이명세 감독 대신 이승준 감독 카드를 꺼내 현재 영화명인 '스파이'로 개봉했다. 하지만 영화는 김혜수 백윤식 이정재 송강호 이종석 조정석 등의 멀티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관상'과의 맞대결 속에서도 꾸준히 박스오피스 2위를 지켜냈고 200만 관객을 돌파, 300만 고지를 향해 달리는 중이다.
11월 개봉을 앞둔 '동창생' 역시 감독 교체의 아픔을 겪었다. '동창생'은 박신우 감독이 약 1/3 정도의 분량을 촬영한 뒤 박철관 감독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빅뱅 탑이 주연으로 나섰다는 점, 배우들의 액션 연기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하반기 최고 관심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연출자가 바뀌면 작품에 대한 견해, 시각, 기법 등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흐름과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배우들도 카메라 밖 상황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베스트컷을 끌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들간의 합이 여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각자가 분석하고 연기해온 캐릭터를 새로운 감독 스타일에 맞춰 수정하는 한편, 파트너의 달라진 연기와 컨셉트에도 맞춰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파이'에서 철수 역을 맡아 열연한 설경구는 "배우들끼리는 너무 좋았다. 시사회에서 문소리가 '안좋은 일이 많았는데 영화를 보니 마음이 남다르다'라고 한 말이 굉장히 와닿았고 짠했다"고 전했다. '동창생'에 출연한 한예리 역시 "감독님을 믿고 열심히 했다. 배우들끼리 힘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잦은 감독 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 관계자는 "투자 배급사의 힘이 감독 교체 사태까지 불러올 정도로 강해졌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투자자를 따라가는 추세라면, 감독의 개성은 무시된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봉준호 박찬욱 같이 뚜렷한 색을 가진 감독들이 활동할 수 없게 되고, 그럼 투자자의 입맛에 맞는 비슷비슷한 작품만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 영화의 퀄리티를 떨어트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지은 기자 silk78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