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불러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준비 잘 해서 올라왔습니다."
14일 대구구장. 하루살이의 끝을 온 몸으로 거부하듯 뉘엿한 여름 햇살이 LG의 1루측 덕아웃을 삼켜버릴듯 넘실거릴 무렵이었다. 라커 앞에 나와 있던 투수 임찬규(21)가 김기태 감독과 딱 마주쳤다. 전날 실망스러운 투구로 하룻만에 엔트리 말소된 주키치 대신 급히 1군에 합류한 임찬규. 갑작스러운 콜업에 유니폼 하의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듯 엉성해 보였다. "마침 빨래 돌리던 차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주현이 형 옷을 빌려 입었습니다. 시합용 유니폼 한벌은 있습니다."
40여일 간의 구리의 2군 생활. 생각보다 얼굴은 '구릿빛'이 아니다. "선크림 진짜 센 거 발랐죠." 늘 씩씩하고 패기 넘치는 청년 임찬규. 한달 넘는 구리 생활은 그를 조금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낮경기요? 진짜 더웠죠. 코치님께서 더 던지면 쓰러진다고 그만 던지게 하신 적도 있어요. 경기를 어떻게 하나 했는데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그 엄청난 햇빛 아래로 들어가니 오히려 견뎌낼 수 있더라구요." 피할 수 없다면 맞서는 것이 순리. 몇 발자국 벗어날 수 없는 작은 마운드를 밟고 서야 하는 투수의 운명이다. 평범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2군 생활에서 얻어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특유의 공격적 투구 성향이 더욱 또렷해졌다. "계형철 코치님 지도 하에 직구를 힘있게 때리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2군 시합 때 이닝 동안 일부러 계속 직구만 던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출루도 많이 허용했죠. 기록보다 직구 힘을 늘리는데 주력했습니다."
힘차고 시원시원한 임찬규 표 패스트볼 되찾기. 지난 2년간 찾아 헤멨던 화두다. 그토록 원했던 해법에 성큼 다가선 듯한 느낌. "신인 때 직구요? 사실 그해 시즌 말부터 살짝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체력이 떨어지면서 저도 모르게 힘이 안 붙더라구요." 완벽하게 복원시키지 못한 그 때 그 패스트볼. 잃어버렸던 보물을 찾아내야 임찬규가 산다. 본인도 잘 안다. 패스트볼 구위 향상에 주력한 이유다. "때리는 힘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다고 이전보다 스피드가 엄청 늘어난 건 아니에요. 여전히 140㎞ 초반 정도인데요. 다만 임팩트를 줄 때 힘이 붙은 것을 제 스스로 느껴요. 회전과 볼끝이 좋아진 것 같더라구요."
자신감과 함께 돌아온 1군 무대. 합류하자마자 자신의 변화를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 14일 대구 삼성전에서 2-9로 크게 뒤진 8회말. 선발 신정락에 이어 두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 타자는 전 타석까지 홈런 포함, 3타수3안타 4타점으로 펄펄 날던 박석민. 바깥쪽 공 1개로 평범한 우익수 플라이를 이끌어냈다. 후속 타자 김태완은 공 3개 만으로 스탠딩 삼진을 솎아냈다. 140㎞짜리 패스트볼이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의 끝자락을 강타했다. 대타 진갑용 역시 공 4개만에 돌려세웠다. 141㎞짜리 바깥쪽 패스트볼에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탈삼진 2개를 곁들인 퍼펙투. 삼자범퇴를 이끌어내는 데 필요했던 투구수는 단 8개(스트라이크 7개)였다. 승부가 기운 시점이라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임찬규의 투구는 이전보다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41일만에 1군 마운드에 올랐지만 자신의 공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시즌 후반, LG 마운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 기대감이 뭉클하게 솟아오른다. 시련과 시행착오 속에 차돌처럼 단단해진 약관의 투수 임찬규. 남은 시즌 그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