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한국시각) 끝난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박인비(25·KB금융그룹)의 '캘린더 그랜드슬램'(한 시즌내에 4개 메이저대회 우승) 달성 여부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앞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나비스코 챔피언십(4월), LPGA 챔피언십(6월), US여자오픈(6월)에서 챔피언에 오른 박인비는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컵만 수집하면 남녀를 통틀어 세계 최초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인비는 이날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링크스 올드코스(파72·6672야드)에서 끝난 브리티시여자오픈 마지막 4라운드서 6타를 잃고, 공동 42위에 그쳤다. 세계랭킹 1위 박인비의 발목을 잡은 복병은 랭킹 2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였다. 최종합계 8언더파 208타를 친 루이스는 최나연(26·SK텔레콤), 박희영(26·하나금융그룹) 등 한국 선수들이 장악한 공동 2위(6언더파 282타) 그룹을 따돌리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우승 상금은 26만3989파운드(약 4억5000만원). 루이스는 박인비의 대기록 뿐만 아니라 지난해 US여자오픈부터 한국 선수가 이어온 메이저대회 연승(5연승) 행진도 막았다. 또 아시아 선수가 2011년 LPGA 챔피언십부터 이어온 메이저대회 연승(10연승)도 저지했다.
대회에 앞서 영국의 스포츠 도박사들은 박인비의 우승 가능성을 가장 높게 봤다. 올시즌 3개 메이저대회를 포함해 시즌 6승을 달성한 박인비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은 가장 큰 강점이다. 미국 현지에서 박인비에게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유다. 박인비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낮은 탄도의 샷을 구사한다. 바람이 많은 스코틀랜드 코스에서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에 자로 잰 듯한 퍼팅이 있어 자신감이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비는 대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느린 그린
먼저 박인비는 "느려진 그린 스피드에 적응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며 아쉬워했다. 프로 선수들은 그린 스피드에 민감하다. 박인비는 미국 본토 코스에 적응돼 있다. 많은 대회가 열리는데다 연습 장소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브리티시여자오픈에 앞서 박인비는 느린 그린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US여자오픈 우승 직후 출전한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LPGA 클래식에서 공동 14위에 그쳤다. 당시에도 퍼팅 때문에 고전했다. 대회장은 캐나다였다. 미국 골프장과는 다른 그린 스피드였다. 이번 브리티시여자오픈이 열린 올드코스는 바다와 인접해 있다. 습기가 많은데다 대회 기간중 비바람도 불었다. 그린이 느린데다 대회 기간동안 그린 스피드가 일정치 않았다. 박인비는 일정한 스트로크로 퍼팅을 했지만 그린은 이를 외면했다.
▶엄청난 부담감
루이스는 우승 인터뷰에서 박인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박인비도 사람이더라"며 "박인비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 잘 알고 있다. US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매일 똑같은 질문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것을 잘 이겨냈다"고 위로했다. 실제로 박인비는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그랜드슬램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신경쓰지 않는다"며 애써 외면했지만 정작 브리티시여자오픈이 시작하자 밀려오는 부담감을 이겨내는데 실패했다. 박인비는 대회가 끝난 뒤에서야 "대기록을 앞두고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살면서 가장 큰 부담감이었다. 그 과정을 거쳤으니 앞으로는 어떤 중압감이 오더라도 견딜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무리한 일정
박인비는 브리티시여자오픈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다. 대기록 달성을 앞두고 한국집에서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귀국 인터뷰에서 박인비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집음식을 먹으면서 기력을 보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인비는 한국에 있는 1주일동안 쉬지 못했다. 세계 정상에 오른 1인자로서 해야할 일이 많았다. 수입 자동차 업체가 준비한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서브 스폰서의 행사를 위해 제주도까지 날아갔다 와야 했다. 메인스폰서인 KB금융 그룹 고위층에 인사도 해야 했다. 휴식보다는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신창범 기자 tigger@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