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타석. 경기수에 3.1이란 숫자를 곱한 수치다. 올시즌엔 팀당 128경기가 열리므로 396타석이다. 소수점 이하는 버리도록 돼있다. '규정'이란 말에서 나타나듯, 타자들에겐 타율 만큼이나 민감한 수치다. 꾸준하게 한 시즌을 보냈다는 훈장과도 같다. '풀타임 주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봉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규정타석은 각종 개인상 결정의 기준이 된다. 공식 야구규칙에서는 '개인상 결정의 최소 기준'에서 규정타석을 정의하고 있다. '프로야구의 타격, 피칭, 수비의 개인 타이틀을 획득하려면 균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최소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게 이유다.
타격상, 장타율상, 출루율상의 경우 규정타석의 적용을 받는다. 야구규칙은 메이저리그를 따라 만들어졌다. 총경기수의 3.1배 이상이란 수치가 여기서 나왔다. 마이너리그는 2.7배다. 공식 야구규칙엔 원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소속팀이 한 시즌에 치른 경기수의 3.1배 이상의 타격수를 필요로 한다. 수를 산출할 때 소수점 이하는 버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30일 현재 규정타석을 채운 이들 중 타격 1위는 LG 박용택(타율 3할3푼6리)이다. 롯데 손아섭(3할3푼1리)이 뒤를 이었고, 30일 경기에서 올시즌 처음 규정타석에 진입한 NC 모창민(3할3푼)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모창민은 두 차례의 부상으로 4월 한 달 간 고작 4경기 출전에 그쳤다. 개막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교체된 뒤, 복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루플레이 도중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뒤늦은 규정타석 진입의 이유다. 부상을 완전히 털어낸 5월 둘째주부터 주전멤버로 뛰었다.
모창민 외에도 규정타석 진입을 눈앞에 둔 이가 있다. 바로 삼성 채태인이다. 채태인은 30일까지 247타석에 들어서 규정타석에 1타석 부족하다. 시즌 초 교체투입이 많았고, 5월 말엔 허벅지 통증으로 잠시 2군에 다녀와 타석이 조금 부족하다.
채태인은 올시즌 완전히 부활한 모습이다. 타율3할7푼으로 규정타석에 들어설 경우, 단숨에 타격 1위로 올라서게 된다. 기존 선수들과 격차도 크다. 타격왕 등극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규정타석에 들어온 뒤 부진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고타율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규정타석과는 다소 큰 격차가 있지만, LG 이병규와 이진영, KIA 신종길 등이 장외 타격왕 후보로 꼽힌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뒤늦게 시즌을 시작한 이병규는 규정타석에 43타석 부족하지만, 3할9푼1리라는 놀라운 타율을 보이고 있다. 27타석 부족한 이진영은 타율 3할5푼5리를 기록중이다. 38타석 부족한 신종길은 3할6푼3리다.
물론 이들이 남은 경기에서 규정타석을 채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병규는 매경기 4타석에 들어서도 규정타석에 1타석이 부족하다. 이진영은 안정권에 들 수 있지만, 타율을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다. 경험이 부족한 신종길 역시 마찬가지다.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고도 타격왕에 오를 수는 있다. 야구규칙에 예외조항이 명시돼 있다. '필요 타석수에 미달한 타자가 그 부족분을 타수로 가산하고도 최고의 타율, 장타율 및 출루율을 나타냈을 경우에는 그 타자에게 타격상, 장타율상, 출루율상을 준다'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예외조항이 적용돼 타격왕을 차지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종종 나오는 일이다. 현재 예외규정의 덕을 볼 수 있는 이는 역시 최고 타율을 기록중인 베테랑 이병규다.
규정타석은 타격왕 싸움을 더욱 뜨겁게 만든다.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이들은 보다 많은 경기 출전이 필요하다. 경기에 나서도 교체되지 않고 끝까지 뛰길 원한다. 결국 페이스가 떨어지거나, 잔부상이 있어도 출전을 강행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타율엔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해도 타율 유지가 어려운 판에, 규정타석 때문에 억지로 타석에 들어서다 보면 타율은 자연스레 떨어지게 돼있다.
또한 타석수가 적은 타자는 똑같이 안타를 치지 못하더라도, 타율의 하락세가 크다. 지표가 적기에 당연히 감수할 일이다. 만약 채태인이 규정타석에 진입한다 해도, 자칫 컨디션 유지에 실패하면 순식간에 기존 상위권 선수들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뒤늦게 장내로 들어와 갖게 되는 '핸디캡'이다.
반대로 지금까지 규정타석을 채운 타격 상위권 선수들에게도 고민이 있다. 이들은 타율을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표가 너무 크다. 현재 타율을 유지하는 것도 버겁다. 하지만 아직 장외에 있는 경쟁자들보단 느긋하게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팀 상황이 있겠지만, 시즌 막판엔 컨디션에 따라 출전 여부를 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내 타격왕 후보군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장외 후보들까지. 규정타석이 주는 미묘함까지 더해져 타격왕 싸움은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과연 2013년 수위타자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