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등단한 이래 12년 동안 한 권의 소설집과 세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세계를 심화시켜온 작가 방현희의 두 번째 소설집 '로스트 인 서울'(자음과 모음, 280쪽)이 출간됐다. 표제작 '로스트 인 서울'을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소설집에 수록됐다.
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일단의 변화를 내비친다.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주제들을 밑그림으로 삼고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몰락과 파국을 맞이하는 개인 혹은 관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묘파하는 탁월한 역량은 여전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거나 선택의 여지 없이 위기에 내몰리며('로스트 인 서울',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후쿠오카 스토리'), 환상과 죽음의 세계로 도피하거나('세컨드 라이프', '퍼펙트 블루'),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현실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작품속의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유한 '장소'(허희, 문학평론가)로 제시된다. 작가는 '병든 서울'에서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미세한 결까지 잡아낸다. 7편의 수록 작품이 개별적으로 쓰인 것이지만 연작처럼 긴밀하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든 현실, 이방인이자 타인으로 떠도는 인물들과 무기력한 '나'들
'로스트 인 서울'과 '로라, 네 이름은 미조'의 두 작품에는 주인공 여성을 지켜보는 '나'가 존재한다. '로스트 인 서울'의 나는 안나에 대한 사랑을 품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그녀와 강의 성애와 폭력을 지켜보지만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한다. 그저 "내 사랑이 과장되었던 것은 아닌지"하고 초라하게 되물으며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상황을 방기한다. '로라, 네 이름은 미조'의 '나'는 검시의로서 해부대에 누운 그녀의 위에서 이물질들을 끄집어내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지만 너무 늦은 일일 뿐이다.
무기력한 상황에 놓이기는 '탈옥'과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들도 마찬가지다. '탈옥'에서 주가조작 혐의로 감옥에 들어와 있는 나는 병원에 입원하는 방법으로 도주하기 위해 장기를 떼어내지만 번번이 탈출에는 실패한다. 나는 "마지막에 장을 떼어내다 죽더라도 나가서 죽"겠다고 호언하지만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 간수 앞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는 어려서부터 자신과 어머니를 가혹하게 폭행해온 아버지에게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의 상징인 손목시계를 부수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계획은 계속해서 유예된다.
▶사랑의 상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환상과 죽음으로의 도피
막막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양태가 환상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번 소설집의 두드러진 점이다. '세컨드 라이프'의 '나'는 결혼 16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여행 온 중국의 가흥을 예전에 자신이 형과 함께 살았던 곳이라고 '기억'하고 그 추억들을 '회상'한다. 아내가 그 사실을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착종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한정 없이 기억 속에서 살고 싶었다."고 진술한다. 현재에서 숨 쉬고 있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겠다는 죽은 자로서의 삶을 고집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떠나 기억을 통한 환상을 좇는 데는 형의 투신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방현희의 소설은 '서울'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 병든 서울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로스트 인 서울'은 계속되고, 우리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어디로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 나성률 기자 nas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