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신임 A대표팀 감독(44)의 시대가 열렸다.
그가 처음 그라운드를 밟을 때 꿈꾸지 못한 일이었다. 될성부른 나무가 아니었다. 유난히 작은 키가 걸림돌이었다. 동북고 1학년 때의 키가 1m60 남짓이었다. 합숙훈련을 하면서 우유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남들은 웃을 일이지만 우유에 밥을 마는 심정은 처절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교 2학년 때 불과 몇 달 사이에 1m79까지 컸다. 베스트 멤버로 기용된 것도 그때부터다.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소년대표를 들락날락했지만 제대로 된 세계대회 한 번 출전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미완의 대기'였다.
20세 때인 1989년부터 변화의 기운이 돌았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됐다. 터닝포인트였다. 1992년 처음으로 줄기를 바꿨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고 군에 입대했다. 1992년 포철(현 포항)에 입단, K-리그에 데뷔했다. 포철의 철벽 수비라인을 이끌며 팀의 우승을 일궈내며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신인 선수가 MVP(최우수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10년이 흐른 2002년, 만개했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를 필두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에 섰다. 월드컵은 늘 두려운 벽이었다.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렸다. 피날레 무대인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반전에 성공했다. 주장 완장을 찬 그는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섰다. 4-3. 그의 발을 떠난 볼이 골망을 출렁였다. 세계가 놀랐다. 월드컵 4강이었다. 그의 백만달러짜리 미소에 대한민국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또 10년이 지났다. 그는 선장으로 런던올림픽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잡았다. 북중미의 멕시코(0대0 무), 유럽의 스위스(2대1 승), 아프리카의 가봉(0대0 무), 축구종가 영국(1<5PK4>1 승)을 차례로 따돌렸다. 올림픽 첫 4강의 문이 열렸지만 브라질에 0대3으로 패하며 주춤했다. 위기였다. 3~4위전의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었다. 승부처에서 그는 환희를 연출했다. 일본을 2대0으로 격파하고 사상 첫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가 다시 한번 놀란 이변이었다.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2006년 독일월드컵 코치, 2008년 베이징올림픽 코치에 이어 2009년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이어 런던에서 화려한 역사를 썼다. 그리고 감독으로는 최고봉인 월드컵 사령탑에 올랐다.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